오랫동안 잠을 잤다. 몽상과 망각 그 어딘가를 부유했다. 8살 이전의 기억은 망각 속에 10대 이후로는 몽상 속에 나를 떠맡겼다. 8살은 엄마와 헤어지고 서울에 올라온 해다.
중학생이 되면서 창문으로 사람들의 발만 보이는 반지하 집에서 살게 됐고 어느 날부턴가 아빠도 언니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빠도 엄마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거였다. 도대체 어떤 사정일지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 필요 없고 언니만 있으면 됐는데, 언니마저 연락 없이 안 들어왔다.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의 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참 많이도 언니를 미워했다. 언니를 미워하는 마음은 아편처럼 나를 살아가게도 했고 또 죽어가게도 했다. 미워하는 마음에 중독 돼버린 나는 어느 누구도, 삶의 어떤 순간도 사랑하지 못했고 즐겁지 않았다.
고등학교는 김포공항 근처에 있었다. 김포에서 국제선까지 담당하던 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머리 위에서 비행기가 바퀴를 내리고 착륙시도를 했고 바퀴를 집어넣고 이륙을 했다. 거대한 비행물체가 지구 위에 안착하듯 학교운동장이 비행기 그림자로 가득 채워지면, 그림자를 사뿐 밟고 비행기 위에 올라타 알라딘과 쟈스민처럼 이국적인 풍경과 건물을 내려다보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스무 살이 되면 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거야. 무덤 같은 반지하 집에서 혼자 무서움에 떨다 자는 일 없이, 아침이 되어도 해가 들지 않아 자도 자도 아침이 오지 않는 일 없이,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셔 잠을 잘래야 더 잘 수 없는 이국의 그 어떤 나라로.......'
우울한 감정의 실체를 오래도록 인정하지 못했었다. 나는 주변에 할머니도 계시고 고모도 계시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분들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 같았다. 서른 중반이 넘어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됐다. 나야, 너는 버림받았다고 느꼈구나. 그래서 성장을 멈췄구나.
양귀비 꽃말에 내 인생이 모두 들어있었다. 망각과 잠 그리고 몽상으로 피하던 어린 자아가 이제 어른이 돼야 하는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애썼어. 잘 컸어.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우리 모두 그 시간을 살아내느라 애썼어.
땅 속에서 움츠린 시간만큼 앞으로 꽃은 계속 자라날 거다. 어느 날엔 미처 몰랐던 꽃망울이 피어나는 걸 볼 때도 올 거다. 그럼 난 쟈스민처럼 비행기 위에 올라앉아 이렇게 소리칠 거다.
저길 봐 버림받았다 여긴 시간 동안 오히려 비옥해진 그 땅에서 기어코 피어난 저 양귀비 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