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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살랑 Mar 02. 2024

왕복 8시간, 오로지 수제비 먹으러

경북구미 선녀와 나무꾼


허리가 아프다.

그래서 필라테스할 때 허리위주로 했는데(한 달 ) 8시간의 승차 역시 무리였나 보다. 차가 막혔다. 가는데만 4시간 30분. 그래도 3.1절 연휴에 이 정도면 선방이다.


수제비 먹으러 간다.

경북 구미 금오산 자락의 선녀와 나무꾼. 17년 전 결혼 후 남편직장 때문에 처음 들어본 도시로 내려가 2년을 살았다. 요리도 못했고 내 입에 맞는 식당도 없었던 -주로 먹는 걸로 도시를 기억- 삭막한 곳이었는데 떠나오니 이것만 생각났다. 바로바로 수제비. 주점이라고 하나, 금오산 등산로 입구쯤 주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수제비와 전을 공통적으로 파는 같다.  맛본 건 아니지만 대부분 익히 아는 수제비 맛(이것들도 맛있긴 하)이었는데 이곳은  입 국물을 뜨자마자 독보적으로 입맛을 사로잡다. 뭔가 달라. 내가 요알이나 미식 혓바닥이라먹어보고 이런 재료로 만들었군 파악할 있을 텐데. 이건 몇 번을 먹어도 '뭐지? 도대체 뭘로 끓이면 이런 국물과 맛이 나는 거지?' 도통 알아낼 수가 없다. 아차, 오늘 김에 물어볼걸. 영업기밀을 알려주셨을랑가. 그래도 혹시 모르는데 아줌마의 오지랖은 이럴 때 뭐 했는지 참으로 아쉽다.


아무튼 맑다. 국물이 맑아.

오매불망 고대하던 것을 허겁지겁 먹느라 사진도 안 찍었는데 다행히 이성이 있었던 남편이 찍어놓은  있었다. 국물이 맑은데 멸치맛은 아닌 것 같고. 남편도 멸치비린내는 다며 근데 뭔지 모르겠단다.(혹시 멸치 아냐) 디포리일까 아님 야채육수일까, 뭘까 뭘까, 집에서 흉내라도 내고 싶은데. 머리를 쥐어뜯는다. 근데 국물도 국물이지만 쫄깃하게 뜯어 익힌 야들야들한 수제비면도 따라 할 없을 것 같다.

진하게 우린 맑은 국물에 김가루를 부셔 넣었고 무엇보다 땡초를 듬뿍 넣은 칼칼하게 매운맛이, 안 먹는 나도 뭐라도 생각나는 그런 맛이다. 근데 알고 보니 대학가 주점이나 관악산 아래께 이런 비슷한 맛 즐비하게 파는 아냐? 무식하게 왕복 8시간 걸려 구미를 다녀올 것이 아니라 비슷한 국물의 수제비가 파는지 방문서치라도 하고 올걸 그랬나. 행동하고 머리는 나중에 쓴다.


들깨수제비 사골수제비 등 탁한 국물을 선호하지 않는다.

여긴 청아하게 맑아 맑은데 칼칼해 칼칼하고 찐해 찐하면 사랑해(?). 육아하10여 년 넘게 수제비 하나 먹으러 구미 갈 생각은 못하다가, 주점이나 포차 이런 곳은 가보질 않으니 어디가 맛있는 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작년 대구에 일이 생겨 오랜만에 들렀는데 15년을 잊고 살던 수제비 사랑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1년 내내 나는 구미 수제비 타령을 했다. 아이들도 작년에 이곳에서 영혼의 해갈을 맛보더니 수원에서 서울까지 1시간 거리도 구시렁거리던 놈들이 왕복 8시간을 군소리 없이 버텼다. 이럴 수 있는 애들이구나. 너무 기다려 손을 달달 떨며 다시 맛보게 된 영혼의 해갈 -


그래, 이 맛이야.

수제비 감자전 골뱅이소면무침클리어하고 김치전을 포장해 왔는데 감자전도 포장해 올 그랬다. 여기 감자전은 뭔가 다르다. 바삭바삭 화력조절 감자를 갈은 게 아니라 뭔가 아삭아삭해 근데 그렇다고 감자 건더기가 크게 씹히는 아니야 듬성듬성 갈은 건가 하나도 파악 못하는 나의 미식력이여. 그동안 한 달여 주 2회 필라테스에 나름 소식다고 위가 줄었었데(?) 갑자기 쏟아지는 음식세례에 위가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진다. 먹지 못해 슬프다. 울지 마 바보야~ feat. 음악


다 이루었도다.

여한이 없다. 바로 이 맛을 위해 4시간을 달려왔고 앞으로 4시간을 돌아갈 거다. 진짜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집으로 출발함. 근데 너무 이상하다. 분명히 너무 맛있는데, 작년에 15년 만에 먹었던 그 맛은 아니다. 처음 먹을 땐 신의 계시를 받은 듯 눈물콧물 쏙 빼가며 감동하며 먹었는데 두 번째 먹으러 가면 (맛은 있는데) 뭔가 좀 2프로 다른 듯한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나랑 남편은 그런 경험이 참 많았다. 왜 그러지. 무언가를 처음 접할 때의 놀라움이 사라져서 그런가.  



말은 그래놓고

집에 와 글을 쓰는 지금 칼칼한 그 국물이, 쫀득한 감자전이, 딱 내 스타일 골뱅이소면의 시큼 매콤이, 아차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씬스틸러였던 저 아삭 시원한 깍두기가, 미치도록 그립다. 아놔 맛이 뭔가 다르다며, 이제 안 와도 된다며, 여한이 없다며. 사람이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다.


누가 이 수제비 국물 법 좀 알려줘요 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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