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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랭이 Sep 21. 2023

면접 준비하는데 학원을 왜 가?

소방공무원 채용 마지막 관문, 면접

소방공무원 체력시험을 간신히 통과하고 이제 마지막 관문인 면접만 남았다. 소방공무원 공개채용 시험은 1차 필기점수에서 65%, 2차 체력시험에서 25%, 그리고 3차 면접 점수 10%가 더해져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사람부터 차례대로 채용된다. 2차 시험까지의 나의 점수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나의 현재 위치는 공시에서 흔히 말하는, 면접장에서 바지에 실례만 안 하면, 면접관에게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푼다며 욕설만 안 하면 합격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면접장에서 내가 실례를 할지... 면접관 면전에다가 욕설을 할지... 나도 모르게 다리를 꼬고 앉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점수가 높다고 해서 '끝날 때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소방공무원 면접 준비 방법
 1. 독학
 2. 스터디 모임
 3. 학원


면접을 준비하는 방향은 크게 3가지가 있다. 첫 째는 독학이다. 혼자 거울을 보고 말하거나 자료만 읽어보다가 그냥 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스터디 모임에 참가하는 것이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끼리 자료를 공유하고 서로 면접관, 수험생이 되어 연습해 볼 수 있어 꽤 유용하다. 마지막으로는 학원에 가는 것이다. 사실 학원이래 봐야, 소방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적인 학원은 많지 않았다. 아니 중소도시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리고 후기 따위가 거의 올라오지 않아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위 세 가지 방법 중 두 가지를 병행하기로 했다. 하나는 체력시험을 준비하며 알게 된 사람들을 모아 스터디 모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체력학원 단톡방을 내가 팠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약 20여 명 가까운 인원을 모아 두 개 팀으로 분리해 운영했던 것 같다. 다른 한 가지 면접 준비 방법은 학원을 택한 것이다. 스터디 모임 동생 두 명과 부산에 있는 '스피치 학원'에 등록을 했다. 고향에는 도저히 학원이 없어, 2시간 거리 부산을 택했다.




부산행


주 1회 수업을 하다가 면접시험이 가까워 오면 주 2회 수업을 하는 형태로 운영이 되어 동생들과 '카풀'을 하기로 했다.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오고 난 후 첫 수업에 참석하는 길, 2차 시험까지 통과했겠다, 편안한 마음으로 드라이브 간다고 생각하니 세상 편안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카풀을 위해 동생들을 태우러 가는 길도 낭만 가득 넘치는 가로수길을 나 혼자 달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첫 수업을 열심히 받고 두 번째, 세 번째도 어렵지 않게 왕복을 했다.


그러던 중 고민이 하나 생겼다. 우선 차를 타고 장거리를 달리는 게 조금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체력시험 때 다친 허리가 다 낫지 않아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척추 협착은 최초나 초기일수록 통증이 심하다고 한다. 학원에 가면 몇 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니, 더욱더 곤욕이었다. 그리고 면접 날짜가 임박해 오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에도, 집에 가면 대체로 퍼져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한참을 고민 끝에 결심했다.


부산 한 달 살이를 하기로


부산 한 달 살이


남들은 제주 한 달 살이를 하며 휴가를 보내는데 나는 '부산 한 달 살이'를 선택했다. 우선 방을 구해야 했다. 자취방은 말도 안 되고, 모텔을 일명 '달 방'으로 끊으면 싸게 구할 수 있다는 말에 숙박업소를 전전했다. 인터넷 검색과 도보 검색을 한 결과 마땅한 곳을 한 군데 구할 수 있었다. 연식과 구조는 알 바 아니었다. 학원 근처이면서, 가격만 저렴하면 되었다. 하루에 15,000원인가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12,000원으로 깎아 달라고 해서 일 12,000원에 꼭대기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면접 준비를 하면서도 대리운전을 계속하고 있어서 현금이 조금 남아있었긴 했지만 위태로웠기 때문에 가격 협상은 필수였다.


외출복 두 벌과 실내복 두 벌 운동화 한 켤레, 슬리퍼 한 켤레, 간단한 스킨로션, 칫솔만 챙겨 바로 이사(?)를 왔다. 


수업이 있는 낮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학원에서 내어준 숙제를 하고 편의점에 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후 저녁에는 학원 복도에서 스피치 연습을 주로 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낮부터 저녁까지 자기소개서를 쓰거나 생각정리를 하며, 혼자 연습을 이어나갔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동기들이 있어 점심을 때우는 게 수월했는데, 수업이 없는 날에는 점심, 저녁을 먹는 것이 힘들었었다. 혼자 때우기에는 8,000씩 하는 식사를 하기에는 부담스러워 숙소 옆 시장통을 주로 이용했다. 칼국수집이 두 갠가 있었는데, 칼국수와 김밥을 번갈아가며 식사를 하곤 했다. 두 끼를 해결해도 한 끼를 먹는 것보다 저렴했다.


헝그리 정신으로 며칠 잘 이겨내고 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급성 위경련이 온 것이다.


동기 형님이 수업시간에 잘 챙겨줘서 고맙다며 통닭을 사주시기로 한 건데, 그걸 먹고 와서 집에 오자마자 사정없이 뒹군 것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 소방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이지만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응급실에 가 봐야 낼 돈도 없고,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에 신음하다 날이 밝았다.


수업 있는 날이라 빠질 수 없어 수업에 참석했는데, 상기된 내 얼굴을 보더니 선생님께서 바로 병원에 가 보라신다. 주변에서도 이에 질세라 병원에 바로 가 보라는 말에 같은 건물 아래층에 있는 내과를 방문했다. 


"언제부터 아팠어요?"


"아.. 그게... 어젯밤부터..."


"아침에 바로 오시지..."


"네..."


"급성 위경련이네요. 식사를 잘 챙겨 드세요. 위가 많이 놀란 것 같아요"


급성 위경련 판정(?)을 받은 나는 병원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혼자 있을 때 아프면 서럽다던데, 가뜩이나 사서 고생하러 온 곳에서 아프니 더더욱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면접 준비하는데 학원을 왜 가?


저녁 8시, 복도에서 혼자 연습하고 있던 나를 선생님이 부르셨다. 


"제가 한 번 봐줄까요?"


"네? 와... 감사합니다. 선생님"


면접이 얼마 남지 않아 나름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봐주시기로 한 것이다. 잠시 봐주시는 거였지만 약간의 혜택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또 뿌듯하기도 했다. 선생님 앞에서 스피치를 하니 떨리면서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해 결과는 처참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답답하고 궁금했던 것들이 한 방에 해소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실력은 빠르게 성장했다.


아, 사실 면접을 준비하러 와서 '면접' 학원이라고 표현하지. 내가 다닌 곳은 사실 '스피치'학원이었다. 특정 면접을 앞두고 있는 다양한 수험생들이 학원에 와서 당당하게 내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을 주로 하는 것이 주된 방향이었다. 주변에서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내가 스피치 학원을 다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학원을 뭣하러 다녀?'라는 말을 참 많이 했다. 


나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공무원 면접은 2차 성적까지 나쁘지 않으면 굳이 정말 이상한 사람이 오지 않는 이상 흔히 말하는 '떨어뜨리기 위한' 면접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면접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대부분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한다. 대량 채용을 할 때는 스터디 모임조차도 하지 않는 수험생도 많다. 다만 커트라인에 있는 인원들은 약간의 점수차로 뒤집어질 수 있어 신중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매년 아주 극소수의 인원이 2차까지 고득점을 받고도 3차 면접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쨌거나 내가 학원을 택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보고 싶어서였다. 인생을 걸고 준비하는 시험에 얻어걸린다는 느낌을 받기 싫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서 결과물을 얻고 싶었다. 그게 남들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맞다고 믿으며 나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스피치 학원에서 가르쳐 주는 내용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받아치는 선생님을 보면서 너무 신기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살다 보면 원치 않게 사내교육 같은 걸 한 시간씩 들을 때가 있다. 아니면 며칠 짜리 교육을 순번에 밀려가게 될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 교육에서 뭐라도 한 가지라도 얻고자 메모를 하거나 열심히 들으려는 습관이 있다. 이유가 있는데, 내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이다.


하루 24시간을 초로 환산하면 86,400초라고 한다. 이를 다시 초당 1원으로 환산하면 하루는 86,400원이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 86,400원씩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쓸지 말지는 본인이 결정한다. 잘 사용하면 그 값어치를 잘 활용한 것이고, 잘 사용하지 못하면 86,400원은 그저 길바닥에 버려지는 돈에 불과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86,400원은 저축도 되지 않는다. 매일 리셋된다.


이러한 개념을 머릿속에 넣고 나니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게 마치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힘들어졌다. 그래서 어떤 강연을 들을 때, 최소한 한 가지라도 가져가자는 습관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렇게 가져간 '한 가지'가 언제 어디서 툭 튀어나와 어떻게 인생을 변화시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그 '한 가지'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끌 수도 있다. 나는 그 '작은 힘'을 믿는다.


고졸인 내가 취준생이었던 적도 없으니 면접도 준비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스피치 학원'이라는 곳을 오다니! 언제 다시 이런 곳에 와 보겠나 싶어 학원비가 아깝지 않게 모든 것을 다 배워가리라 마음먹고 덤벼들었다. 매 수업시간마다 한 장짜리로 수업을 요약해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기들에게 파일을 뿌렸다. '가르치면서 공부가 되는 법'이다.


그렇게 접근하고 나니 몇 주가 지나 나는 부끄럽지만 면접 머신이 되고 말았다.



면접 임박 : 면접 머신이 되다

  (선생님 왈 "절대 면접 머신이 되면 안 됩니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이제 나도 어떤 질문이 와도 버벅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질문이 들어오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하고 대답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도 이어나갔다.


하루는 늦은 밤 시간에 취준생들로 모인 반에 들어간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 들어와 보라고 한 것이다. 갑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이 친구는 지금 소방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데, 학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열심히 하는 친구라, 테스트를 해보고 싶은데 손을 들고 아무 질문이나 해보시겠어요? 00 씨 거기 앞에 가서 앉아 볼래요?"


강의실로 들어오라는 선생님 말씀에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압박감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실제 면접이 더 편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선생님께서 불러주셨는데 먹칠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긴장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망설이며 눈치를 보고 있던 학원생 한 분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소방공무원이 왜 되려고 하시는 거예요? 짧게 이야기해 주세요"


3초간 호흡을 가다듬었다.


"네, 제가 소방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이유는~(생략)"


으로 시작된 나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고, 주문한 대로 간략하게 대답하고 마무리했다. 술렁이는 원생들 사이로 다음 질문이 들어왔다. 두세 번의 질문을 모두 막힘없이 물리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괜히 우쭐해진 나는 강의실을 빠져나갔고 선생님은 강의실 창문 틈 사이로 엄지 척을 보내왔다.


자신감이 꽤 붙은 나는 조별모임도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동기들이 내가 약간 로봇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면접머신 같다는 이야기다. 어떤 질문이든 툭툭 받아치니, 약간 이질감이 든다고나 할까. 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음... 나도 가르치면서 항상 그 부분을 주의를 주는데, 면접을 준비하려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연습이 너무 과하게 잘 되어 있으면 기계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래서 이제는 힘을 빼는 연습을 해봐요"


선생님도 스피치, 면접 분야에서는 뼈가 굵으신 분이라 당연히 나 같은 부류를 많이 보신 것 같았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 힘을 빼는 연습을 했다. 말투도 바꾸고 악센트, 호흡까지... 아예 싹 갈아엎었다. 


수험생 패션 안녕, 이제 나도 정장을?


최종 면접이 얼마 남지 않아 아버지와 함께 아웃렛으로 갔다. 그동안 공부만 하느라 정장 한 벌도 없어 면접용 정장을 구입하러 간 것이다.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가격이 괜찮은 정장하나를 골랐다. 정장 위에 입을 코트가 있냐는 점원의 말에 비싸다며 돌아가자고 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다시 돌아 세우신다. 


"코트도 하나 사라"


"에이~ 괜찮아요~"


수험기간 동안 아버지께 손 벌리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는데, 정장과 코트에 무너질 수는 없어 계속 거절했었다. 그런데 딱 마지막 관문에서 아버지 '치트키'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무기는 부산에서 준비했고, 갑옷은 아버지가 골라주셨으니 이제 출격만 남았다.


'승전보를 올려드리겠나이다'



컵라면에서 삼계탕으로


20대 초반... 말 안 듣고 사고만 치고 다니던 시절. 우여곡절 끝에 군 입대를 했다. 그때가 1월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집에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차가운 버스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흘깃흘깃 구경하며 오랫동안 볼 수 없는 창 밖 풍경을 애써 눈에 담았었다. 대전에 도착한 나는 배가 고파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 하나를 구입했다. 


"(경상도 사투리로)이↗거↗ 얼↗마↗에↗요↗?"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에↗요↗?


"(내가 듣기에는 표준어로)네? 손님? 뭐라고요?"


"(순화된 경상도 사투리로)이↗거→ 얼→마↗에↘요↗?" 화살표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금세 식어버린 컵라면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논산훈련소로 가는 버스에 다시 올라탔고, 배웅하는 이 없이 서둘러 훈련소로 빨려 들어갔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1월이 돌아왔다. 1월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상황은 많이 달랐다.

정신 좀 차리고 공부도 열심히 했고, 무엇보다 열심히 살았다. 살기 위해 살았다. 평범한 삶을 다시 찾기 위해 남들보다 뒤처진 만큼 뛰어오르려고 노렸했다.


그리고 지금 1월. 이제 나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취업의 전선에 뛰어드는 수험생이 되어 전장으로 가는 출발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바로 나의 멘토, 나의 친구. 아버지께서 함께 해주시기로 한 것이다.


평일이었으니 연가를 쓰신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따라오는 극성 수험생처럼 보일까 봐 거절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애쓰심에 나는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기로 했다.



같이 시험을 준비하던 동생 두 명을 함께 태우고 출발했다.


단체면접을 먼저 치른 후 개별면접을 끝내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옛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내어 다시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점심으로 '삼계탕' 한 그릇을 사주셨다.


군 입대를 하며 혼자 먹었던 컵라면은 나의 식어버린 열정처럼 빠르게 식었었지만, 그날 먹은 삼계탕은 쉬이 식지 않고 내 오장육부를 뜨겁게 달구어 주었다.






2016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대 장정이 비로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모든 과정을 다 끝내었다는 안도감에 마침내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결과야 어떻든 이제는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혹여나 마킹 실수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후회할만한 것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들 과정이 중요하니 결과가 중요하니 갑론을박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의 과정에 한 치의 의심도 없으니 나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과정'에게만큼은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과정'은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결과', 너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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