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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랭이 Sep 21. 2023

수능 8등급, 8등으로 소방관 되다.

평범한 일상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제5장. 화재완진


화재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들은 인명검색과 연소확대를 방지하는 노력을 하는 한편, 화점을 찾아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한다. 화재 진압에는 수 분에서 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화재의 규모에 따라서 진화 시간은 상이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인생에 달라붙었던 작은 불씨가 이제는 큰 화재가 되어 내 인생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화재현장 속 시커먼 연기처럼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지난 시절을 보내면서, 다 내려놓고 포기해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아무리 많은 소화수를 때려 부어봐도 화염은 그대로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좌절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살고 싶었다. 미친 듯이 살고 싶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모아 억지로 맞춰 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에 나는 현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고, 그 것은 마치 화재 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단 비처럼 내 가슴속으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그 깨달음은 내 인생의 붙은 화염을 빠르게 꺼트려 나갔고 비로소 '완전 진화'할 수 있었다.




합격자 발표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대리운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방학교에 들어가면 교육비가 조금씩 나온다지만 그때까지 놀고먹으며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시간이 많아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강도 높게 일을 해 나갔다. 늦게까지 일을 한 덕분에 김해, 양산, 부산까지... 다양한 목적지를 오가며 수입도 안정적으로 챙길 수 있었다.


합격자 발표 전 날은 일을 하러 가지 않았다. 하루만이라도 좀 쉬고 싶었기 때문도 있지만,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에 운전하다 꼭 사고라도 날 것만 같아 얌전히 짐에 있기로 한 것이다. 택시를 하시는 어머니도 하루는 쉬어라며 나의 '휴식 합리화'에 동조해 주셨다.


 



합격자 발표 당일


9시에 발표가 예정되어 있던 것과는 다르게 좀처럼 발표가 나지 않았다. 시스템 오류가 생겨 늦어지는 듯했다. 애가 탔지만 소방 카페에 들락날락하며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글을 읽으면서 시간을 때웠다.


오전시간을 훌쩍 넘어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때즈음 카톡과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마치 스마트폰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미친 듯이 진동해 댔다. 


키보드 상단에 있는 F5를 힘차게 눌렀다.


.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서 혹시나 나쁜 소식이라도 들릴까 숨죽이며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됐나?"


"응"


"와~!!! 진짜 대단하다!!!"


나는 필기 발표날 많이 울어, 이번에는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대단하다'는 말 뒤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감지되었다.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는 경상도 사나이답게 짧은 대답인 "고생했다"를 시작으로 축하해 주셨다.


어머니는 온 사방팔방으로 전화를 돌리며 아들의 시험합격을 자랑하셨다. 그만하라고 말리고 싶었지만 즐기시게 두고 싶었다. 그동안 자랑할 것 하나 없는 아들 녀석이 그래도 자랑할 구석이 하나 생겼는데, 그저 오늘 하루만큼은 전화 수 천 통을 해도 그냥 두고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수능 8등급이었던 내가 공교롭게도 8등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교육생 번호는 또 놀랍게도 8번을 받게 되었다.





상처 입은 10대...


컨테이너에서의 14년...


비뚤어진 20대...


학비가 없어 그만둔 대학...


교통사고로 얻은 신체화 장애와 큰 흉터...


하루 한 끼만 겨우 연명하며 2시간씩 출퇴근 길을 걸어 다녔던 창 없는 지하방에서의 1년...


식빵과 우유로 버텨낸 도서관 생활...


아픈 어머니를 매일 한두 시간... 혹은 세 시간씩 주물러 드리며 공부했던 지난 2년


무시당하고 욕 들어 먹으며, 단어장 하나 손에 들고 밤길을 누볐던 728호 대리기사의 흔적...


새벽이면 택시기사 어머니와 같이 퇴근해 같이 어묵 하나씩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그 시절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수년간 치매가 있으션던 할머니를 홀로 돌봐오셨던 아버지...




모든 순간, 모든 시간들이 소중하고 감사가 넘치는 순간이었다. 진정으로 긴 터널이었다. 끊길 것 같던 끈을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붙잡아 얻어낸 행복이다.




소방공무원, 혹은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이 보다 더 어려운 시험과 더 어려운 난제들이 많다.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한 분들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남기는 것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환경을 탓했지만 진흙탕도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진흙탕을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아니, 자신이 할 수 있다. 이제는 씻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제는 어려울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자.


수능 8듭급을 받은 것이 무슨 자랑이겠냐마는, 나 같은 인생도, 조금은 더 평범한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본다면 누구든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평범함 속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다. 가진 것이 많아야 꼭 행복한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평범함을 위해 한 노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와 당신의 평범한 일상은 그 누구의 것보다도 더욱 밝게 빛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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