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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랭이 Sep 11. 2023

옷 네 겹, 이불 네 겹만 있으면 됩니다

좌절하지 말자. 오늘을 잘 살아내자

중학교 졸업 전 마지막 겨울방학.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친구들은 선행학습을 한창 이어나가고 있었,

나는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내려진 결정은 아니었다. 경제적인 문제가 생겨 크고 작은 빚을 안게 되었고, 부모님께서 집을 내 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위치는 바로 당시 살던 집의 건너편 작은 주택이었다. 

어린 마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야, 너 이사 간다며? 어디로 가?"

"응, 주택이라던데?"

"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모임을 가지고 있는 둘도 없는 친구들이었다. 우리 네 명은 전학생들로 만나 집에 가는 시내버스에서 인사한 것을 시작으로 애 아빠가 된 지금까지 그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서로의 행복과 아픔을 오랫동안 공유한 나의 진짜 친구들이다.


이사당일, 친구들과 이삿짐을 옮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친구 이사한다고 도와주러 오는 친구가 몇명이나 될까... 어머니는 고맙다며 짜장면을 시켜주셨다. 그런데... 내가 보는 부모님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수년 전 생긴 빚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집으로 오는 온갖  전화를 받아내야 했다. 개인부터 시작해 금융회사, 은행까지... 악성민원 전담 상담사가 된 것 마냥 온갖 전화를 다 받아내었다.


나 같은 꼬맹이가 전화를 받으니 좋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협박성 전화였다. 욕설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갓 유치원을 다니던 동생에게 입에도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은 사람도 있었는데, 동생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 말을 따라 하자 난 수화기 너머로 내 나이를 망각하고 내가 아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 욕설 받아 적이 있었다.


하루는, 여동생이 "오빠, 누가 우리 보고 있어."라고 하자 고개를 돌려보니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 창문 틈으로 시꺼먼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쳤다. 순간 몸이 얼어붙어 아무 말도 안 나왔으나, 나는 동생에게 "아빠한테 전화해"라고 말하며,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잡기 위해서였다.


빚 독촉 전화가 이렇게 사람을 피 말려 죽인다는 것을 초등학생 때 벌써 알아버렸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것이 두려웠다. 전화벨소리 비슷한게 울리면 심장부터 뛰었고, 이른바 불안증 같은 것이 생겨버렸다.


꽤 자라고서도 전화나 문자를 두려워하는 트라우마가 생겼고, 이것이 내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전화가 올 때마다 부모님은 화를 내시거나 다투시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 동생을 밖으로 데려가 토닥거리며 '내가 다칠 테니까, 너는 절대 다치지 않게 내가 보호해줄게'라며 놀란 동생을 달래곤 했다.


조용히 방에 들어 손바닥 만한 수첩에 지금의 심정을 그대로 써 내려가며 감정을 토해내었다. 다 쓰고 나면 엎드린 채로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그 눈물이 방금 써 내려간 글씨들을 모두 번지게 하고 나면 정신을 차리고 방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곤 했다.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이사를 마치고 들어간 집은 참으로 좁디좁았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 집이 얼마나 작은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 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커서 보니 실평수가 8평 정도는 되어 보였고, 집이 아니라 컨테이너 박스였다. 단열재와 방음재가 전혀 없는, 스티로폼 하나 들어가 있는 주택용도로는 쓰지 않는다는 가장 싸고 간단한 재질의 컨테이너였다.


비가 오면 우산 아래보다 시끄럽고, 겨울에는 바깥보다 춥고, 여름은 바깥보다 더워 숨을 쉴 수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사 당시부터 10년 넘게 이어진 주변 공사로 인해 정신은 더더욱 피폐해져 갔다.


여름엔 더워 모두 집을 떠나있다시피 했다. 천장이 몇 번 무너져 내려 빗 속에 울며불며 거실을 청소했다.


겨울도 나을 게 없었다.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내복 위에 운동복을 입고, 그 위에 교복바지와 웃옷을 걸친 후 그 위에 아주 큰 운동복을 덧입은 후 두꺼운 이불을 네 겹으로 덮어 자곤 했다. 얼굴은 나와 있지만 몸의 체온이 어느 정도 추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입에는 김이 새어 나왔고 몸은 여전히 냉기가 있었지만 그냥 자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공부를 계속 이어나가겠노라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결국 잘 되지 않았다. 1학년 첫 시험에서 수학을 95점을 받았다. 정말 밤새 공부했다. 기말고사도 잘은 아니지만 선방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공부에 대한 동기를 잃어갔다.


곰팡이 핀 벽지, 거미줄 친 천장, 발이 얼어버릴 것 같은 바닥,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탓하며 나는 점점 공부와 멀어져 갔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조언에도 나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키 좀 컸다고 생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께 대들기도 했다.


"공부하라고만 하지 말고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하며 부모님의 가슴에 뽑히지도 않을 대 못을 박기도 했다.




출처 : 경향신문


세계에서 가장 긴 터널은 스위스의 '코트하르 베이스 터널'이라고 한다. 길이는 약 57km에 달한다. 누군가 이 터널의 길이를 알려주지 않고 이곳에 들어가 걸어 나가 보라고 하면 들어갈 엄두가 날까... 아마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뒤를 돌아보아 빛이 사라지면 놀래서 되돌아올 것이다.


아무도 내 인생의 터널의 길이가 얼마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살다 보니 그때가 터널 속이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에 몰리다 보니 나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아니 나보다 나의 부모님이 더 이를 악물고 버텼을 것이다.


행복한 인생을 바라기보다는 평범한 인생을 바랐다. 부자가 되기보다는 빈(貧)에서만 벗어나기를 꿈꿨다. 화려한 독립보다는 함께 집을 원했다.


비록 공부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삶에 대한 의지는 꺾지 않았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언젠가 나아질 내 삶을 기대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이 평탄한 길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갔다. 공부는 쏙 빼고 말이다.


그리고 결국 세월이 흘러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평범한 가정과, 덤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글로 표현하니 단 숨이지만 어쩐지 그때 그 시절은 꽤 오랫동안 숨을 참았던 것 같다.


인생의 향방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어쩐지 이번 생은 꼬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잠시일 수도... 오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좌절하지 말자. 평탄한 길을 원하는 게 인간이지만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는 인간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없다. 있으면 있다고 걱정, 없으면 없다고 걱정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저 점 하나에 지나지 않을 자신의 어두운 상황을
 너무 비관하지만 말자.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안아주고 사랑하자.
 그리고 더 나아질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 최선을 다해 살아내자.


언제가 될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나, 내가 꿈꿔왔 꿈같은 평범한 일상이 어느 순간 내 눈앞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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