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문을 열고 책방 지기가 안으로 들어온다. 둘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채원의 눈에도 고작가의 눈에도 시야를 흐릴 만큼 잔잔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이야?'
채원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고 고작가를 한껏 끌어안고 말았다. 깜짝 놀란 고작가는 채원의 품을 달아나 책방 구석으로 뛰어갔다. 고작가를 안자마자 그와 함께 했던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덩그러니 남은 채원의 두 손에 그가 잡아챘던 손목의 온기가 느껴졌다. 고작가는 완벽히 그였다.
채원의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말 도 안 돼'
따끔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겨우 책방을 빠져나왔다. 검은 돌담길을 돌아 작은 포구로 걸어갔다. 답답했던 마음을 바닷물에 풀어놓는다. 물감이 물을 만나 번지듯 슬픔이 바닷물에 번져간다. 채원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에서 나는 그의 기억과 마주한다. 기억인지 기억 속에 숨어있던 그인지. 채원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손바닥을 바라보며 그의 온기를 확인한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채원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잊은 채 멍하니 푸른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채원의 빨간색 자동차가 해안 시원하게 속도를 낸다. 한쪽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한 표정의 채원은 심란한 마음에 괜히 노래의 볼륨을 크게 높인다. 커다란 소리 앞에서 더 커져가는 감정을 채원이 겨우 붙잡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채원의 귓가에 남아있는 그의 목소리가 노래소리보다 더 크게 울린다. 그러고는 심장으로 파고들어 자리를 잡는다.채원은 그의 목소리를 가슴에 담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채원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포털 사이트의 초록색 네모 안에 그의 이름을 넣었다. 손가락이 기억하는대로 모음과 자음을 하나하나 누르다 채원은 잠시 망설인다. 하얀 바탕 위에 까만 점같이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채원은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끝내 엔터키를 누르지 못했다. 채원은 그에 대한 두려움과 그리움의 경계에서 서서 서성이게 되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 들었어.'
채원은 무언가 결심한 듯, 노트북을 닫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기억들이 영화처럼 눈앞에서 상영되고 있다. 릴스처럼 짧게 끊어지는 영상들 속에서 채원은 지금 현실을 살고 있는지 과거를 살고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풀어보려 해도 도무지 풀리지 않는 그런 기분이다.
'근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 사람이면..? 진짜 그 사람이면? '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채원은 냉장고로 다가가 맥주 한 캔을 집어 든다. 딸깍 거리는 소리와 탄산의 소리가 채원의 방안 가득 울려 퍼진다. 답답한 마음에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서 삼킨 뒤 침대 옆 협탁에 빈 맥주캔을 내려놓는다. 몽롱한 기운으로 그대로 쓰러져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런 채원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린다.
"있잖아... 채원아.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띠링-
핸드폰 알림 소리에 겨우 잠에서 빠져나온 채원은 일어날 힘도 없이 옆으로 누워 핸드폰을 열었다. 일희일비에서 올린 인스타 피드에는 고작가의 사진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일희일비입니다.
저희 책방에서 한 달 동안 마스코트 역할을 했던 고작가의 새로운 가족을 찾으려고 해요
고작가는 조천 하나로 마트 주차장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까지 임시 보호를 하고 있었는데요
저희는 이미 다른 고양이를 키우고 있고 최근에 다섯 마리의 귀여운 아기 냥이들이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고작가에게는 새로운 가족을 찾아주고 싶어요.
사는 곳은 김녕 근처이면 좋겠어요. 가끔 고작가의 사진을 주고받을 수 있으면 더 좋구요.
소중한 생명을 품어주실 집사님은 DM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올라온 사진을 보니 고작가의 러그 위에 누워 햇빛 샤워를 하고 있다. 고작가의 사진을 본 채원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채원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니 고민하는 척하고 있다. 마음은 이미 고작가를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채원은 서둘러 DM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오늘 오전에 다녀갔었는데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고작가의 새로운 가족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이상해졌어요.
저의 발목에 몸을 비비던 고작가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네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고작가를 데려오고 싶어요.
그럼 연락 부탁드립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채원은 긴 한숨을 내쉰다.
'사고 쳤네. 이채원.'
띠링-
어머, 기억해요. 이상하게 고작가가 친한 척을 하길래 저도 의아해하고 있었어요.원래 사람에게 쉽게 곁을 내어주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새로운 가족을 찾으면서도고민이 많았거든요. 내일 시간 되실 때 책방에 들러 주시면좋겠어요.
그럼..
채원은 그를 아니 고작가를 집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환청인지 환생인지 알 수 없지만 채원은 고작가의 실체를 확인해야만 했다. 둘 만 있는 공간이라면 고작가의 말이 들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서. 채원은 서둘러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작가에게 예쁜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다. 채원의 눈빛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하고 흐릿했던 생각들도 말끔하게 청소된다.
다음날, 채원은 일을 끝내자마자 김녕으로 달려갔다. 노을이 하늘이라는 캔버스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늦은 오후였다. 채원은 책방 골목 앞에 서있다.
휴- 길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다듬고 골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하지만 무서워서 돌아 볼 수가 없다. 분명 내 뒤에 누군가가 있다. 채원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살며시 핸드폰을 열어 카메라를 켰다. 그리고 셀카 모드로 전환한 뒤, 어깨 근처로 가져가 조금씩 천천히 뒤쪽을 비춰보았다. 다행히 채원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채원은 의아해하며 조금씩 아래쪽으로 카메라를 옮겼다.
"다시 왔네."
채원은 귀를 의심했다. 아니 눈을 의심했다.
채원의 뒤에는 고작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채원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여전히 골목에는 채원과 고작가 둘뿐이었고 방금 들은 목소리는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고작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꼬리를 잔뜩 세우고 도도한 발걸음으로 채원을 지나갔다. 채원을 앞질러 책방 쪽으로 걸어가는 고작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진짜였어?... 정말?"
채원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가슴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고작가는 채원 쪽으로 고개를 한 번 쓱돌리더니 "야옹" 소리를 낸 뒤 책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멍해진 상태로 발이 이끄는 방향으로 채원이 걸어간다. 책방 앞에 도착한 채원은 민트색 미닫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채원의 곁으로 다가와 사정없이 몸을 비벼대는 고작가.
"안녕하세요. 골목에서 고작가를 만났어요. 밖으로 돌아다니기도 하나 봐요."
"어젯밤에 나갔다가 지금 들어왔어요. 나름 즐거운 일탈을 즐기고 있나 봐요."
'일탈이라니.. 그때나 지금이나 일탈을 좋아하던 그 성격 그대로구나'
갑자기 미닫이문이 열리고 다른 손님이 책방 안으로 들어온다.
"고작가랑 잠시만 계셔주세요. 잠깐 손님 응대 좀 하고 올게요."
"네, 천천히 하세요."
한쪽 구석에 마련된 작은 러그에 누워있는 고작가를 쓰다듬는 채원.
"너 이제 나랑 우리 집에 갈 거야"
"너네집? 나 어젯밤에 다녀 왔는데?"
"뭐라고?"
순간 채원의 동공이 끝이 없이 커다랗게 변하고 있다. 채원을 바라보던 고작가의 동공도 함께 커진다. 신비하고 오묘한 고작가의 눈동자 속으로 채원은 한없이 빠져들었다. 채원은 고작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러자 채원의 품을 파고드는 따뜻한 고작가의 체온이 전해진다.
"가자, 채원아"
말없이 채원의 손을 이끌고 인파를 가로질러 가던 그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귓가에 맴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꿈이라면 채원은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