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뜯는 채원을 바라보는 고작가. 책방의 가장 높은 창문 옆에 가만히 앉아 창밖의 채원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야아옹- 야옹- 야아옹-
아쉬운 고작가의 마음을 알리 없는 채원이 책방에서 서서히 멀어져 간다. 다가갈 수 없는 고작가의 울음소리가 김녕 바다가 마을 골목을 가득 채운다.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고작가의 눈. 그 눈에 작은 파도가 일렁인다.
'이채원.. 너.. 진짜 나 몰라?'
채원의 방. 채원은 양손을 포개어 얼굴 아래에 두고 침대에 엎드려 있다. 꿈속에서 들렸던 그의 목소리에 마음이 아려온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채원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잠에 빠진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석같은 불빛을 밝히는 명동의 한 가운데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 여자가 서있다. 밝은 코랄색코트를 입고 하얀 부츠를 신고 하얀 장갑을 낀 여자는 잠시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확인한다. 다시 사람들에게 시선을 옮겨보지만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어디에다가 시선을 두어야 할지 난감하다. 5분쯤 지났을까. 채원이 한 곳에 시선을 두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채원의 손목을 빠르게 낚아채며 끌어당긴다.
"아야!"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인파 사이로 빠르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채원의 손목을 잡고 있는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맞잡은 손으로 전해지는 익숙한 온기가 12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손난로처럼 느껴진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걸어가는 채원의 표정이 마냥 신난 아기처럼 밝다. 카멜색 롱 코트를 입은 그의 큰 키와 넓은 어깨에 채원의 마음이 설렌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지만 어쩐지 두 사람만 있는 느낌이 든다. 주위는 모두 흐릿해지고 단 한 사람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한적해진 골목 안으로 들어와 걸음을 멈춘다. 이제서야 뒤를 돌아보며 채원을 당겨 껴안는 그.
"메리 크리스마스"
"뭐야, 놀랐잖아~ 납치하는 줄 알았네"
"납치 맞는데? "
"뭐야~"
채원은 여전히 그에게 안겨 그의 눈을 바라본다. 그의 눈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느리게 깜빡이며 지그시 채원을 바라보는 눈빛에 채원은 다시 그에게 설렌다. 그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나의 이름을 부른다.
'채원아 있잖아..'
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채원. 잠에서 깬 이후로도 가슴에는 그의 목소리가 남아있다. 채원은 손바닥을 바라보며 방금 꿈에서 맞잡은 그의 체온이 남아있는 듯 생각에 잠긴다.
"아니야, 아닐 거야.."
채원은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나와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빠르게 달려나간다. 지금 채원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고양이. 단 하나뿐이었다.
-김녕 일희일비
채원의 빨간색 자동차가 시원하게 뚫린 해안 도로를 달린다. 푸른색의 말끔한 하늘과 아무렇게나 떠다니는 구름과 함께 겹겹이 다른 색을 보여주는 바다가 있다. 골목과 골목 사이를 돌아 김녕 일희일비에 도착했다. 반듯하게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끈다. 엔진이 조용히 사그라지듯 채원은 핸들을 잡고 잠시 고개를 묻는다.
"결국 여기까지 다시 왔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자동차 문을 쾅! 닫고 성큼성큼 책방으로 걸어간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채원은 긴장감과 설렘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책방이 보이는 골목 안으로 시선을 옮긴다.
골몰에 들어서자 들리는 고작가의 울음소리.
"야아옹~야옹~"
멀리서 창문 근처를 서성이는 고작가의 실루엣이 보인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걸음을 옮겨 다시 책방 문 앞에 섰다. 다행히 오늘은 책방 지기의 모습이 보인다. 민트색 문을 스르륵 열고 들어가는 채원 앞으로 고작가가 천천히 다가온다. 다시 빠르게 뛰는 심장, 채원은 순간 어지러움을 느낀다.
"어서 오세요"
상냥한 여자가 채원을 맞는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있는 사이 이미 고작가는 온몸으로 채원을 반기고 있었다. 발목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며 최선을 다해 애정표현을 하는 고작가를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얘가 이런 아이가 아닌데.. 이상하네요"
"원래 애교가 많은 타입이 아닌가요? 너무 자연스러운데요?"
"아니에요. 절대. 얼마나 도도한 고양이인데요. 웬만해선 눈길도 주지 않아요.
고작가가 손님이 좋은가 봐요."
밝고 온화한 책방 지기의 말을 들으며 잠시 책방을 둘러본다. 그때 책방 지기의 휴대폰이 울린다. 자연스럽게 문밖으로 나가 미닫이 문을 닫는다. 다시 고작가와 채원 둘만 남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고작가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세를 낮춰 고작가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채원"
"꺅! 뭐야! 너!"
"내 목소리 기억해?"
"장난치지 마"
문이 닫혀 안과 밖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어떤 소리도 드나들지 않는 책방에서 채원은 고양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 번은 잘못 들었다 치더라도 두 번째는 달랐다. 채원은 확인해야 했다. 고작가를 양손으로 잡고 눈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고작가도 채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 목소리 기억하는구나."
"지금 이게 무슨..."
이때 문을 열고 책방 지기가 안으로 들어온다. 둘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채원의 눈에도 고작가의 눈에도 시야를 흐릴 만큼 잔잔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이야?'
채원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고 고작가를 한껏 끌어안고 말았다. 깜짝 놀란 고작가는 채원의 품을 달아나 책방 구석으로 뛰어갔다. 고작가를 안자마자 그와 함께 했던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덩그러니 남은 채원의 두 손에 그가 잡아챘던 손목의 온기가 느껴졌다. 고작가는 완벽히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