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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푸른색 Dec 17. 2023

슬기로운 고립생활

프롤로그


"어머니, 겨울에 한두 번 차량 운행이 어려운 시기가 있어요.

기간은 일주일 정도..."


"네?"


"그 지역이 가끔 눈이 오는데 눈이 오면 고립되거든요."


'이게 무슨 말인가.'


제주에 입도한 후 아이의 어린이집 상담을 갔다가 남편과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늘 제주에 첫눈이 왔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시와 산책' 첫 페이지를 천천히 읽었다. 첫눈 오는 날에 꼭 다시 꺼내서 읽어보려고 아껴두었던 페이지를 이불 속에서 눈으로 마음으로 담았다. 정말 커튼 너머의 무언가가 느낌으로 전해졌다. 커튼을 살짝 열었더니 반가운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하얀 팝콘 같기도 작은 꽃잎 같기도 한 눈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창밖의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고 정지된 장면에 눈송이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벚꽃나무 아래에서 벚꽃잎이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바라볼 때처럼 눈송이도 그러했다.




일상을 함께하던 모든 풍경에 하얀 눈이 덮였다. 익숙했던 장면들이었지만 흰 눈 하나로 통일감이 생겼다. 깨끗하게 마감된 모습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공평하게 덮인 눈들은 평범함을 새롭게 만들고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밤사이에 소리 없이 내린 눈은 나뭇가지 위에도 잡초 위에도 빨간 동백 꽃 위에도 나란히 서있는 자동차 위에도 똑같은 하얀 쿠션을 덮어주었다. 손으로 콕 찔러보면 팥빙수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질감에 어른도 아이들도 눈 가까이로 손을 가져오게 한다. 손가락의 온기가 눈을 사라지게 하지만 눈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지난주 '귤다방'에 들러 언니에게 폭설에 대한 진실을 들었다.


"언니 진짜 여기 폭설이 와요?"


"그럼~ 예전에 걸어서 슈퍼까지 갔다 오고 그랬지."


사실이었다. 남편과 나는 어제 마트에 가서 비상식량을 구비했다. 혹시 모를 고립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중산간지역에 살며 배달의 민족이 닿지 않는 곳이라 냉장고 두 대에 먹을 것을 넉넉하게 챙겨두지만 왠지 조금 더 준비해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마트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속으로 '모두 고립을 준비하는 건가?'하며 웃었다. 불시에 고립되는 것은 두렵겠지만 적당히 의도적인 고립은 설렘을 준다. 그렇게 눈이 내리기만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눈. 눈이 온 것이다.




제주에서의 첫눈이 조용히 우리를 찾아왔다. 차는 다니지 않고 재설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도로와 내리막길은 아이들의 눈썰매장이 되었다. 이 글을 발행하고 아이들과 눈썰매를 타고 눈사람을 만들 예정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이 쌓인 산책로를 조용히 걸으며 이어폰으로 캐럴을 들어야겠다.


작은 마을에 고립된 우리 가족은 우리만의 방법으로 눈이 가져다준 고립이라는 선물을 받으려 한다.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오롯이 우리의 시간을 만들며 추억이라는 하얀 쿠션을 서로의 마음에 쌓아가려 한다.


우리에게만 반가운 첫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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