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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푸른색 Oct 27. 2024

크리스마스의 가장자리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 있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 있다.       



   

아빠가 치료를 받고 퇴원하던 날이었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병원 로비에 커다란 트리가 세워졌다.          


'곧 크리스마스네'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둔 12월 22일. 나는 로비에서 퇴원하는 아빠를 기다렸다.               

병원 로비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좀 다른 분위기가 났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로 서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알던 크리스마스트리 앞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트리 가까이 가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트리에는 메모지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나는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가서 메모지에 적힌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평범한 트리에서 볼 수 없는 소원들이 트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모두 건강을 염원하는 글이었다. 아픈 아이를 둔 부모의 간절함, 치료를 받는 부모님을 위한 응원을 남긴 자녀, 입원 중인 친구를 위해 크리스마스 메시지. 그곳에 있는 소원들은 모두 아픈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였다. 세상에는 나뭇가지처럼 뻗어있는 다양한 아픔이 있었고 오로지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 끝에 걸려 있었다.          




'세브란스 소원 트리 10주년'       

   

나는 지금 소원 트리 옆에 있는 커다란 배너 앞에 서 있다. '세브란스는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라는 빨간 문구가 가슴을 울린다. 소원. 내가 지금 간절하게 원하는 소원은 단 하나다. 아빠의 쾌유. 나는 메모지를 꺼내어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아빠

내년에는 더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지내면 좋겠어요

힘든 치료 잘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아빠를 응원하고 있어요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2022.12.22         



      

나는 파란 빵 끈 하나를 꺼내어 소원 트리에 메모지를 걸었다. 사진도 찍어 가족들이 함께 보는 채팅방에 남겼다. 우리의 마음을 아빠에게 전해져서 아빠가 조금이라도 더 우리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잠시 후에 퇴원 절차를 마친 아빠가 로비로 내려왔다. 아빠는 나에게 잠시 인사를 하고 곧장 소원 트리로 갔다. 내가 남긴 메모지를 찾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안다. 내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내년을 기약한다. 세상에 단 하나의 기적이 있다면 욕심을 부려서라도 내가 가지고 오고 싶다. 소원 트리에 적힌 수많은 사연 속에서 내 소원을 들어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트리에 매달린 간절함 덩어리 사이에 우리가 내민 소원이 제일 먼저 선택되기를 바랐다. 간절함과 더 간절함의 싸움이었다. 



              

크리스마스의 가장자리에 있던 가족들이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없을지도, 병실에서 쓸쓸하게 캐럴이 흘러나오는 티브이 화면으로 위안을 삼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작은 기적이 우리에게 찾아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 나는 두 딸과 함께 케이크를 준비하고 예쁜 루돌프 머리띠도 챙겼다. 식탁 위에는 맛있는 음식이, 두 손녀의 웃음소리가 딸과 사위의 어쩌지 못하는 마음과 남편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내의 슬픔이 한곳에 버무려졌다. 지금부터 우리가 마주 보고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이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준비라는 걸 할 수 있기는 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손녀들은 할아버지 앞에서 예쁜 짓을 한다. 사랑해요 할아버지 하면서 안기는 손녀를 보며 아빠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이 아이들이 예쁘게 커 가는 모습을 아빠에게 계속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왜 하필 아빠에게 병이 찾아온 걸까.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평범한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크리스마스. 아빠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아이들과 함께 준비한 케이크, 친한 언니가 줄을 서서 사다 준 케이크와 쿠키, 엄마 아빠의 머리 위에 빨간 루돌프 머리띠까지 풍성하고 따뜻한 크리스마스 식탁이 차려졌다. 아빠와 엄마가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는다. 찰칵찰칵. 거실을 울리는 셔터 소리, 그런데 아빠 사진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이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우리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라는 걸 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크리스마스란 기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이다. 일 년에 딱 하루 아이들이 기대하는 크리스마스 선물과 한 해를 잘 마무리하는 염원이 모여 즐겁게 지내는 것. 하지만 나는 크리스마스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야 깨달았다. 내가 살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반대편에 무수히 많은 아픔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만 모르는 척하며 살았다는 것을.    



                

다시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아빠와 마지막으로 보냈던 사진을 꺼내보다가 옅게 웃고 있는 아빠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수척해진 아빠가 겨우 힘을 내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액정 속에 살고 있는 아빠를 따라 나도 천천히 입꼬리를 올린다. 내가 활짝 웃을 때마다 보이던 아빠의 표정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크리스마스가 올 때마다 아빠의 기억도 함께 따라오겠지. 산타클로스와 루돌프가 함께 오는 것처럼. 그렇게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아빠가 와주면 좋겠다. 꿈속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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