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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푸른색 Oct 27. 2024

채혈실 앞에서

흔적도 추억이 되는 순간이 있다.



흔적도 추억이 되는 순간이 있다.




집을 나서는 마음이 무겁다. 등본을 떼러 동사무소로 걸어가는 동안 애꿎은 하늘만 바라봤다. 동사무소 앞에 있는 작은 부스 안으로 들어가 서류를 발급하는 기계 앞에 섰다. 이름을 누르고 주민번호를 눌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작은 체크박스 몇 개를 클릭하고는 마지막으로 결제 버튼을 눌렀다. 이제 몇 초만 지나면 아빠가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증명서 한 장이 나온다. 기계 아래쪽으로 떨어진 종이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아빠는 없지만 종이에는 아빠의 이름이 남아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아빠의 이름을 매만졌다. 아빠의 상실이 종이 한 장으로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게다가 아빠의 이름 옆에는 ‘사망’이라는 두 글자가 무겁게 찍혀있었다.




'이제 정말 끝이 났구나.'         

     



사망서류를 들고 병원으로 갔다. 당사자가 사망했으므로 병원에서 필요한 서류를 떼려면 아빠의 서류와 가족의 서류가 동시에 필요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지방에 있었기에 병원에서 필요한 서류를 떼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집 앞에서 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익숙한 길로 들어서자 천천히 숨이 조여왔다. 익숙하기도 생경하기도 한 이 길 위에서 나는 누구보다 심란했다. 아빠가 치료를 받으러 수도 없이 지나다녔던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병원으로 갈 때마다 묵직한 상자 안에 갇힌 아빠와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병원 쪽으로 걸어갔다. 큰 문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아빠랑 함께 탔던 에스컬레이터에 혼자 서있는 기분이란 몸 안에 있는 장기 하나가 사라진듯한 공허함이었다. 아빠는 채혈을 위해 금식을 해야 했고 채혈 후에야 약간의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병원 진료를 위한 과정이었지만 매일 야위어가는 아빠가 금식을 할 때마다 나도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목에 커다란 돌덩이가 막혀 도저히 내려가질 않았다. 그때의 감정이 소용돌이쳤지만 나는 숨을 들이쉬며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천천히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채혈실 앞으로 갔다. 암 치료를 받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보였다. 그런데 수많은 환자들 사이에 문득 아빠가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과거와 현실이 뒤섞인 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 찾은 채혈실 안이 북적거린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통이 주삿바늘 끝에 있었다. 보호자는 그저 바라볼 뿐 고통은 오롯이 환자의 몫이다. 나는 환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를 지켜보는 보호자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통을 바라보는 고통. 세상에 없는 형벌을 받게 되는 보호자들의 얼굴에 바늘을 꽂는 듯한 통증이 그려진다. 그들을 보자마자 병원에 있어도 좋으니 숨만 붙어있어도 좋으니 아빠가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명치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이제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아빠가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한 기분으로 병원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눈앞에 보이는 복도를 따라 계속 걸었다. 시술을 받던 곳, 진료실 앞, 카페와 엘리베이터 앞. 특정 장소를 지날 때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들이 보였다. 그 찰나의 순간들이 빨리 감기 상태로 무질서하게 튀어나왔다. 나는 아빠가 치료를 받던 그 시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다시는 이 병원에 오지 않으리라.




로비로 내려와 걸음을 멈춘다. 높은 천장과 수많은 환자들. 끝을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갇혀있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나는 끝이 났지만 여전히 진행 중인 사람들. 바쁘게 돌아가는 병원 안에는 어쩔 수 없이 삶을 멈추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우리 가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랑 같이 와서 편하다.”       

   


아빠가 병원에 와서 했던 첫마디였다. 로비를 빠져나오면서 아빠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를 스쳐간다 너랑 같이 와서 병원 진료를 보는 것이 편하다고 그래서 불편함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아빠의 한 문장에 담긴 깊은 뜻을 안다. 나는 아빠의 딸이니까. 아빠는 편하다는 한 단어에 이런 마음을 담았을 거다.



'미안하고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딸아.'



아빠의 사랑은 여전히 소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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