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켜서 했을 뿐인데

내가 한 일이 ‘지랄’이 되었다.

by 하우주

다음 날, 변호사님이 나를 불렀다.

"김 차장님, 어제 대표님이 갑자기 난리 쳤다면서요??"

"아… 네. 들으셨어요?"

"나한테 직접 김 차장님이랑 같이 하라고 했고, 1년이나 해 왔는데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하게 됐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변호사님."

“괜찮기는요, 나야말로 김 차장님 덕분에 일하지, 나 혼자 절대 못해요.”

“…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내가 대표님한테 다시 얘기해 볼게요.”

“아… 네.”


변호사님은 좋은 분이셨다. 회사에서 몇 안 되는 상식적인 어른. 이 회사랑 참 어울리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변호사님은 글로벌 외국계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신 후 이 회사에 오셨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한국 회사에서 일을 해 보겠어요.”

웃으며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이 회사에 와서는 해외에 처음 갔을 때보다 더 큰 문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아직 이런 곳이 있나? 대한민국 중소기업 현실이 정말 이런가?’

외국계 회사도 성과가 중요하고 어딜 가든 이상한 사람들은 있다지만, 옛날 80년대를 보는 것 같은 회사 분위기와 불합리한 순간들을 볼 때마다 슬펐다고 하셨다.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중소기업의 현실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 안타깝고 슬펐다고.


계약서는 항상 문제였다. 그간 겪어본 바로는 대부분의 중소기업 대표들은 회사 내부에 변호사를 채용하거나 법무팀을 두지 않았다. 매번 크게 일이 터지고, 소송이 생겨야 겨우 외부 로펌을 알아보거나 은퇴한 변호사를 고문으로 두는 정도였다. 고객사들, 거래처들과 주고받는 기본적인 계약서도 검토하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다. 계약서 하나 잘못 체결해서 회사가 망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주변에서 보면서도 ‘그저 운이 나빠서’ 겪게 되는,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상황이라 생각하며 쉽게 사인을 했다.

예전 회사에서는, 계약서를 받아 보고 ‘회사에 불리한 내용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가 ‘그냥 사인하면 될 걸 왜 구질구질하게 토를 다냐’고 소리를 질렀던 대표도 있었다. 결국 일이 터졌는데도 ‘세상에서 변호사들에게 주는 돈이 제일 아깝다!’라며 대표는 분해했다.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자기 자식은 변호사 시켜야겠다는 말을 하는 걸 보고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



그러고 보니 왜 난 매번 내 일도 아닌 일을 하고 욕을 먹고 있는 걸까. 밀려오는 생각들에 빠져 들던 찰나, 변호사님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다음 주 화요일 오전에 외부 법률사무소랑 미팅 있어요. 소송 다음 변론기일 준비 때문에. 같이 갈 시간 돼요?."

"네, 다른 일정은 없습니다. 그런데 가도 될지…"

“내가 대표님한테 얘기할게요, 걱정 말아요.”

“예, 팀장님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변호사님이 대표한테 얘기해 준다고 했으니, 이제 좀 괜찮아지겠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지만 팀장님과 일정 조율만 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 또 무슨 별일이 있을까 했지만, 기어이 또 일이 터지고 말았다.




화요일.

출근하자마자 변호사님과 함께 외부 법률사무소에 갔다. 회사는 신문에 날 만큼 큰 소송 중이다. 상대측 대응 전략을 논의하고, 다음 변론기일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두 시간 정도 미팅을 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수고했어요, 김 차장님. 오늘 내용 정리해서 공유해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회사에서 준비해야 할 리스트들도 해당 부서에 다 보내줄래요?"

"네, 변호사님."

미팅 내용을 정리하고, 부서별로 메일로 보내고, 다음 날 주간업무보고를 준비했다. 외근을 다녀오니 일할 시간이 더 부족했다. 신입 사원일 때 야근을 하고 있으면

“지혜 씨, 우리에겐 내일도 있어~ 내일이 안 올 것처럼 일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

라고 말씀하시던 상사 분이 계셨다. 다정한 말 한마디, 언제나 힘을 주는 건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따뜻함을 나누던 회사, 그 시간이 언제나 그리웠다.



수요일 오전, 주간업무보고.

팀장님이 팀 발표를 시작했다. 지난주 업무 보고, 이번 주 계획.

"김 차장 업무 보고 드리겠습니다. 어제 화요일에 법무팀과 함께 외부 법률사무소 미팅에 참석했습니다. 소송건 관련해서…"

대표가 손을 들었다.

"잠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느낌이다.

"김 차장이 거길 왜 가?"

대표가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네?"

"소송 미팅을 니가 왜 따라가?"

"변호사님께서 같이 가자고 하셔서…"

"변호사가 가면 되지. 니가 왜 가? 니가 변호사야?"


지난주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니가 변호사야. 뭣도 아닌 것이.

"내부 자료 취합이랑 정리를 제가 하고 있어서, 변호사님께서 같이 가서 논의하고 준비를…"


"지랄하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지랄하고 있다고!”


쐐기를 박듯, 대표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숨이 막혔다. 머리가 띵해지면서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앞으로 법무 관련 외근은 변호사만 가. 다음."

팀장님이 발표를 이어갔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보고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다들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는 것 같았다. 책상에 앉아야 할지, 나가야 할지 나의 다음 행동을 내가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앉아 있으면 사무실의 그 정적을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책상 위에 수첩을 내려놓고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직원들의 모든 눈이 조심스레 나를 향해 있다는 걸,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복도 끝 화장실 문을 여는데 손이 떨렸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자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가장 끝에 있는 칸에 들어가 변기 위에 그대로 앉았다. 참았던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나는 우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변기 물을 내렸다.


몇 번 더 물을 내리고 나서야 나는 일어나 문을 열고 나왔다. 거울을 보니 눈이 빨갛다. 이렇게 운 흔적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물을 틀어 손에 물을 받아 양쪽 눈에 갖다 댔다. 벌게진 눈이 빨리 가라앉아야 했다. 몇 번을 반복하니 찬 물에 손이 시렸다. 그러나 3월이 되자마자 회사는 따뜻한 물을 잠가 버렸다. 차가워진 손바닥을 눈에 대고 지그시 눌렀다. 차츰차츰, 마음도 가라앉고 눈도 괜찮아지는 것 같다.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니 벌써 30분이 지나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여전히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고, 직원들은 흘끔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잠긴 모니터에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전화가 울렸다. 변호사님이었다.

“김 차장님, 얘기 들었어요. 제가 대표님께 얘기했는데… 잊은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나한테는 알겠다고 했는데 나 참…”

“괜찮습니다, 변호사님.”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또 괜찮다고 말했다.

"차장님 죄송해요. 나도 지금 화가 나서 대표님한테 가서 얘기 좀 해 보려고 해요.”

“예…”

더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변호사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표에게 화를 내건, 무슨 이야기를 하건 이제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자리를 비웠던 팀장님이 돌아와 앉았다. 변호사님께 이야기를 하고 온 것 같았지만 딱히 더 말을 건네거나 하진 않았다. 같은 팀이라고는 하지만 회사의 IR과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팀장과 업무가 크게 겹치진 않았다. 부서의 이름만으로 같은 팀으로 묶여 있는 팀장님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변호사님께 빨리 알려준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점심시간.

오늘은 애써 괜찮은 척 식당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저는 좀 나가 보겠습니다.”

라고 팀장에게 이야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밥맛이 없었다. 뭐가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회사에서 한 블록 떨어진 지식산업센터 건물에 있는, 커피맛이 괜찮은 작은 카페로 향했다. 3월인데 아직 바람이 차갑다. 카페에 도착해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시키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성준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현아 언니가 보낸 카톡을 다시 봤다.

'걱정한다고 바뀌는 건 없잖아? 좀 더 이기적이어도 되니까 무엇보다 너 자신을 아껴 주렴.'


너 자신을 아껴 주렴.

나는 나를 아끼고 있나?

지난주에는 '뭣도 아닌 것이'. 이번 주에는 '지랄하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시당하고 험한 말을 들었다. 시킨 일을 했는데, 도우라고 해서 도왔는데 돌아오는 건 욕설뿐이다.

회사에서 시켜서 한 일이,

어느 순간 ‘뭣도 아닌 것이’ 하는 ‘지랄’이 되었다.

부모님께도 단 한 번도 욕을 듣지 않고 자랐다. 사회에 나와서도 이렇게 누군가 면전에 대고 욕을 한 건 처음 겪는 일이다.


'이게 뭐지… 난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 야근하고, 욕 듣고, 모멸감 느끼고. 월급 받으면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건가?

그들이 월급을 준다는 이유로, 나에게 이렇게 함부로 할 권리가 있는가?

이게 내가 나를 아끼는 건가?


카페 사장님이 거품이 탄탄해 보이는 라떼를 앞에 내려두고 갔다. 손이 떨릴 것 같아 두 손으로 컵을 들었다. 손으로 따뜻함이 전해졌다. 조금 살 것 같았다. 한 모금 마셨다. 또 조금 살 것 같다. 커피잔을 그대로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조금씩, 마셔 넘겼다. 목이 말랐었나 보다. 몸에 피가 도는 것 같다. 차가워진 몸에 온기가 도는 것 같다.


따뜻한 라떼를 마시며 생각했다.

‘오늘은 칼퇴를 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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