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월급 사장인 S사장이 지혜가 일하는 층의 사무실에 내려와 서성거리고 있었다. 지혜는 한 공간 안에 S사장이 있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회사는 대형 건물의 3,4,5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고, S사장의 자리는 5층, 지혜의 팀은 4층에 있다. 부서가 바뀌면서 4층으로 내려온 지혜는, 한 층에 있으면서 오며 가며 S사장을 마주치지 않아서 좋았다. 지혜에게 S사장은 이 회사에서 불편하고 어려운 상사 그 이상으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 중 한 명이었다. S사장이 사무실에 들어올 때 눈이 마주쳐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지혜는 S사장이 주변에 있다는 불편함을 억누르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 내로 끝내고 싶은 보고서가 있었다.
몇 십 분째 모니터를 보고 있으니 다시 눈이 뻑뻑해져 왔다. 몇 달 전 안구건조증이 생겨 수시로 안약과 눈물을 넣어야 했다. 인공눈물을 꺼내려고 책상 서랍 가장 아랫칸을 열어 박스를 집는 순간, '툭', 의자가 흔들렸다.
“맛있는 거 혼자 먹지?”
S사장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뒤에 왔는지, 지혜의 서랍 한 켠에 있는 초콜렛과 사탕들이 든 지퍼백을 본 듯했다. 다시 툭, S사장은 의자를 다시 한번 슬쩍 찼다.
“농담이에요”
마스크 속 지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의자를 발로 차다니... 직원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존댓말을 쓰며 교묘하게 숨기고자 했지만 숨겨지지 않았다. 사람의 진심과 진짜 모습은 평소 별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과 행동에서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지혜는 몸을 일으켜 심호흡을 했다. 이미 윗분들에게 나빠질 대로 나빠진 평판이니 더 어려울 것도 없었다. 지혜와 S사장의 불편한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팀장이 뜬금없이 S사장에게 말을 꺼냈다.
“사장님, 일 잘하는 김차장을 제 팀으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혜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초콜렛 하나 드릴까요”
그렇게 꺼낸 초콜렛에 다시 S사장의 라떼가 시작되었다. 본인이 전 회사에서 많은 국가들을 출장 다녀봤는데, 초콜렛은 어디 것이 맛있고, 그 나라는 이게 좋더라 블라블라블라... 지혜는 팀장이 있는 쪽 책상 가장자리에 초콜렛을 올려놓고는 다시 노트북 모니터와, 연결된 일반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리에 앉아 있으니 S사장의 '발길질'에 흔들린 느낌이 계속 남아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얼마나 세게 찼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직원에게 말을 건네는 방법이 의자를 발로 차는 행위라는 것이 지혜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S사장은 여전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성격 좋은 팀장 옆에 서서 초콜렛을 먹으며 옛날 얘기를 하고 있었고 지혜는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을 가는 척 밖으로 나갔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시작이 그러하듯 처음에는(물론 나이를 먹고 경험이 더해질수록 그 또한 바래져 가지만) 설렘이라는 것이 있었고 지난 시간들 속 경험했던 것처럼 매번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망각한 채, 또다시, 이번은 좀 다르지 않을까라는 헛된 기대를 이번에도 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은 놀라움과 실망과 당황 혹은 당혹에서 분노로 변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자 체념하게 되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또다시 더 큰 실망을 하고 더 큰 분노의 감정이 올라오고 급기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는 본인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김지혜, 여성, 한국나이 41세, 미혼, 대한민국 중소기업 만년 차장 4년 차. 요즘은 좋소기업이라고도 부르는 중소기업을, 첫 회사를 그만두고 쉬었던 8개월과 자의반타의반 백수 1년 여를 제외하고 꾸준히, 성실하게 15년째 다니고 있다. 올해가 마지막 차장 직급일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연애나 회사나 똑같아, 회사는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에서 일을 하고 연애도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랑 하는 거야"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는 회사를 만나지 못한 지혜는 14년의 기간 동안 꽤 여러 곳의 회사를 거쳤다. 중소기업 어디 가나 비슷하단 이야기를 그녀는 수없이 들었고 지혜 본인 또한 후배들에게 수없이 하며, 가능하기만 하다면 대기업이나 외국계로 이직할 것을 권했다. 그래도 지금 다니는 회사는 그동안 다녔던 회사들에 비하면 규모가 조금 있는 중견기업이자 코스닥 상장사였기에 그간 일했던 회사들과는 조금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면접 일자가 잡히자 더욱 공을 들여 경력 발표 자료를 만들어 면접을 봤고 입사가 결정되자 친구들에게 선언했다.
"나 여기서 정년퇴직할 거야."
회사를 처음 소개해 준 예전 직장 선배도 나쁘지 않을 거라 했다. 중소기업을 다니다 운이 좋게도 대기업으로 가게 된 선배는 직접 다녀본 곳은 아니지만, 선배에게도 이직을 제안했던 이 회사의 S사장이 회사에 대해 해 준 이야기들을 지혜에게 전해 주었다. 대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면서 성장한 회사라 아직 옛날 제조업을 벗어나진 못해 복지는 없어도 성과급을 잘 줄 거라고. 오너 생각이 그렇고 사장의 생각 또한 같다고. S사장은 전년도에도 회사 실적이 아주 좋진 않았지만 성과급을 받았노라고, 많지는 않아도 스톡옵션도 조금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회사가 성장하면서 변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했다. 훗날 생각해 보니, 선배는 중소기업 임원급으로의 이직 제안을 뿌리치고 대기업 평사원에 머물렀고, 지혜는 중소기업을 거쳐 대기업으로 어렵게 이직한 그가 중소기업의 임원의 자리가 어떠함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대기업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배의 선택은 아주 옳았다. S사장이 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달콤한 척 포장하였으나, 포장 껍질의 반짝이조차 손에 가루처럼 묻어나는 불량사탕일 뿐이었다. 지혜는 가끔 선배와 연락을 할 때면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선배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ㅋㅋㅋㅋ"
미안해하는 선배에게 짓궂게 카톡을 보내면서, 지혜는 슬픈 ㅋㅋㅋ 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지혜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지혜 본인 또한 알고 있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지혜의 또 다른 좋소기업 생활은 시작되었고, 이 회사는 지금껏 다녀본 회사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경험들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