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더 화이트 큐브의 수 유 신의 풍경화
누구나 한 번쯤은 파도가 밀려간 바닷가 모래 위에 나타난 새하얀 조개껍데기를 주워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쯤은 차갑게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넣어 반질반질한 돌멩이 하나와 산길을 걷다 마주한 꽃잎이나 풀잎 하나를 주워 간직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것들일지라도 그저 그러한 순간의 행위가 그때의 공기, 감촉, 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하게 해준다.
여기 특정한 장소에서 직접 수집한 재료로 풍경을 그리는 수 유 신(Su Yu-Xin, 1991-)이라는 작가가 있다. 그녀는 ‘인사이드 더 화이트 큐브(Inside the White Cube)’ 시리즈의 《뉴 모로이즘(New Moroism)》 전시를 통해 신비로운 색채와 특이한 질감을 가진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그림1]. ‘인사이드 더 화이트 큐브’는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고 세계적인 작가들이 소속된 화이트 큐브 갤러리가 동시대의 유망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시리즈이다. 2023년 9월 9일까지 홍콩 화이트 큐브에서 수 유 신과 함께 이 시리즈에 참여한 티모시 라이(Timothy Lai, 1987-), 마이클 호(Michael Ho, 1991-), 크리스 후엔 신 칸(Chris Huen Sin Kan, 1991-) 등 아시아 태생으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환경에서 작업하고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전시에서 수 유 신이 보여준 작품들은 특정 지명이 작품 제목에 포함된 ‘풍경화’들이다. 전통적인 풍경화와 다른 이 동시대의 회화는 오묘한 색으로 미지의 공간을 그리는 듯하면서도 실제 장소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연기가 구름이 되어(Smoke becoming cloud #2)>라는 작품 제목에는 ‘화와이, 마우나 케아(Mauna Kea, Hawaii)’라는 지명이 덧붙여 있다. 마우나 케아는 말 그대로 하와이의 흰색 산(kea는 하와이어로 흰색을 의미)이다. 하와이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 년 내내 하얀 눈으로 뒤덮인 화산이다. 작가는 이 화산을 표현하기 위해 화산에서 채취한 다양한 색상의 화산재를 사용하였고, 역시 직접 수집한 흰색 진주 가루를 갈아 하얗게 보이는 화산의 표면을 나타냈다[그림2]. <일출 회랑(Corridor of sunrise)>이라는 작품 역시 ‘대만, 코끼리 바위(Elephant Trunk Tunnel, Taiwan)’라는 지명이 덧붙여 있다. 이 실재하는 명승지는 작가가 수집한 흙, 광석, 도자기 등을 가루로 만들어 얹힌 작가만의 묘사와 색을 통해 구상과 추상 사이로 재형성되었다[그림3].
그녀가 만들어 내는 풍경화의 독특한 점은 바로 자신이 경험한 장소에서 수집한 재료들을 가공하여 만들어 내는 이 ‘핸드 메이드’ 안료에 있다. 작가가 직접 분쇄하여 물리적으로 혼합한 미세한 가루들은 독특한 색감을 만든다. 그리고 이들은 또 다른 안료들과 함께 표면에 광택이나 특유의 질감을 구현해 작품 자체를 다양한 색깔을 가진 반투명한 조약돌 같은 느낌으로 만든다. 실재 장소에서 온 재료들이 만들어 내는 이 질감이 결과적으로 묘사한 장소를 실제와 다른 제 3의 장소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만들어진 색상 시스템에 의존하기보다는 화가이자 색상 연구자로서 ‘지구’의 물질을 이용한다. 자신이 경험한 땅, 바다, 산, 암석 등이 보여준 색상을 인식하고, 나아가 상상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작가의 지리적 위치와 삶을 반영하는 물질이다. 현대 화학의 발전으로 사용 가능한 색상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해진 현대사회에서 작가가 직접 수집한 재료를 통해 만들어 내는 것은 하나의 ‘색상’임과 동시에 작가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장소’로 이는 사람의 경험을 기억하고 저장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PLACE 화이트 큐브 갤러리
1993년 제이 조플링(Jay Jopling, 1963-)이 설립한 화이트 큐브 갤러리는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갤러리로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부터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1963-) 등을 포함한 YBAs(Young British Artists)의 작품들을 발굴하여 판매하였다.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1950-) 등의 세계적인 작가들이 소속되어 있다. 2023년 9월 홍콩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화이트 큐브 서울 지점 개관을 앞두고 있다. 한국의 박서보(1931-)도 화이트 큐브 갤러리의 전속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