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공항에서 밖으로 발을 내딛자 처음 맡아보는 향이 났다.
어? 무슨 향이 나는 것 같지 않아?
내가 물었다.
그래?
재우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울의 일산화탄소 섞인 공기와는 차원이 다른, 청정한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왔다.
꽃 향 같기도 하고 풀 향 같기도 해. 이게 여기 냄새인가?
나는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새로 도착한 나라의 이국적인 냄새를 담아보려 애썼다.
호주는 여름이었다. 한국에서 패딩을 입고 간 나와 재우는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패딩을 벗었다. 하지만 패딩 안에 입고 있었던 옷도 하필 스웨터여서 미리 갈아입고 나온 주변 여행객들에 비해 우리만 이질적으로 보였다.
재우가 캐리어 지퍼를 반만 열고 손을 넣어 반 팔 티셔츠 두 장을 차례로 꺼냈다.
민준아, 안 되겠다. 갈아입자. 여기.
티셔츠를 받아 들며 재우에게 조용히 말했다.
잇츠 써머 나우.
재우가 씩 웃었다.
재우는 예약한 우버 택시를 찾아 앞장서서 걸어갔다. 멀리 있는 밴에서 차량 번호를 확인하고는 나에게 알렸다. 각자의 캐리어를 끌고 택시로 향했다. 우리의 캐리어는 반 정도밖에 차지 않은 가벼운 상태였다.
여행을 결정하고 일주일 만에 항공편과 호텔만 예약하고 떠난 참이었다. 시드니에서 뭘 할지, 어디를 가볼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떠났고, 벗어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클럽의 사장은 일을 그만두겠다는 재우와 나에게 다른 친구를 소개해주고 가라고 했다. 이 바닥에서는 신뢰가 중요한데 아무나 와서 약 팔았다가 품질 나쁘다고 소문나면 큰일 난다고도 했다. 재우는 알아보겠다고 하고는 클럽에서 나와 사장의 휴대전화 번호를 수신 차단하고 삭제했다. 누구 인생을 또 망치려고 소개해주래. 재우는 탐욕스러운 사장의 둥그런 얼굴에다 주먹 한 방 날리고 싶었다며 아쉬워했다.
짐을 싣고 좌석에 앉아 우버 택시 기사에게 예약한 호텔을 일러 주었다. 차는 9인승 밴이었는데 나와 재우만 타기에는 너무 넓었다. 빈 좌석을 보니 12살에 간 제주도 여행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예약할 때 실수를 하셨는지 렌터카 사무실에는 커다란 승합차 한 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볼품없이 큰 차를 보며 한숨을 쉬셨지만 나는 그 큰 차가 좋았다. 여행 내내 형과 빈자리에 돌아가며 앉았고 졸리면 누워서 잘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모시던 승용차보다 차체가 훨씬 크고 높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제주도의 풍경보다 승합차가 더 기억에 남았었다. 밴의 빈 좌석을 보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잊어야 했다.
호주에 도착한 지 3일이 지났다. 호텔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에나 가보자고 해서 버스를 타고 가봤다. 인터넷으로 찾아봤던 오페라 하우스의 이미지보다 전체적으로 좀 누리끼리한 것 같았다. 다른 관광객들은 모두 그 앞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신나 했다. 오직 나와 재우만 별 감흥 없이 계단에 앉아있었다.
계단에 앉아서 나는 유리를 생각했다. 재우가 호주 이야기를 했을 때, 사실 속으로 혼자 설레었었다. 유리가 지금 호주에 있을까? 이모와 함께 좋아하는 빵을 만들며 지내고 있을까? 유리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습은 변했을지가 궁금했다. 내가 갑자기 찾아가면 놀라지는 않을까? 내가 유리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 놀랐다. 이제 다 희미해져 버린, 빛바랜 추억 정도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는 유리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오늘.
내가 말했다.
유리를 좀 만날까 해.
재우는 그러라고 하고는 눈이 부셔서 더 이상 못 있겠다며 먼저 일어섰다. 멀어지는 재우를 보다가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유리가 남긴 편지. 그 안에 적혀 있던 이모의 베이커리 주소를 사진 찍어놓았었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834 Burton St. Darlinghurst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정말 유리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베이커리는 묵고 있는 호텔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얀색 바탕에 빨간 글씨로 J’S HOUSE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가게 앞에는 크고 작은 화분에 초록빛 키 작은 나무들이 심겨 있어서 싱그러우면서도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커다란 통유리창 안으로 페스츄리와 베이글, 스콘과 파이 등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크지 않은 공간에 빼곡하게 빵들이 들어차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자 진한 버터 향이 물씬 풍겼다. 유리가 좋아하던 바로 그 버터 향이었다. 여기가 맞는구나, 유리는 여기 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유리창을 통해 가게 안을 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단박에 안으로 들어서기가 머뭇거려져서 나는 문을 그냥 지나쳤다. 한 십 미터 걸어가다가 다시 뒤돌아서 걸었다. 반대편에서 봐도 가게 안에는 역시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용기 내어 문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느껴졌다. 계산대 뒤로 오픈 주방이 보였다. 빵집은, 진열공간은 작은 데 비해 안에 있는 주방은 큰 것 같았다. 주방에서 믹서기로 무언가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 있는 사람이 유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입술이 바짝 말랐다.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고 머리를 한 번 만졌다. 미용실에 갈 때가 지났건만 왜 안 가서 덥수룩한 채로 여길 왔을까 잠시 후회도 했다. 다행히 면도는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때 믹서기가 꺼졌다. 사방이 조용해지고 내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유리에게는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인기척을 냈다.
주방에서 그녀가 나왔다. 하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연한 노란색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었다.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단발머리의 그녀는 뿔테 안경을 콧등에 걸쳐 쓰고 있었다.
유리의 이모였다. 유리와 많이 닮아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언제나 따뜻했던 유리와 어쩐지 성품도 닮아 보였다. 그때 나는 주방을 향해서 서 있었다. 빵을 하나도 고르지 않고 계산대와 주방이 있는 곳을 쳐다보고 있는 나는 아마 누가 봐도 이상했을 것이다. 이모가 고개를 갸웃하며 메이 아이 헬프 유? 했다. 나는 그제야 허둥지둥 빵을 골랐다. 집게로 빵을 고르는 동안 뒤통수가 따가웠다. 빵 네댓 개를 고른 쟁반을 이모에게 건넸다. 이모는 힐끔 내 얼굴을 보며 계산했고 액수를 말해주었다. 빵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돈을 냈다. 유리의 이모가 건네는 종이봉투를 받아서 나는 부리나케 가게를 빠져나왔다. 같은 호주 하늘 아래, 푸르디푸른 이 호주 하늘 아래에 나와 유리는 함께 있었다. 오늘은 유리가 이렇게나 가까이 있다는 확신만 가지고 돌아가기로 했다. 유리와 다시 연인이 되고 싶은 것인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조만간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나는 호텔로 향했다.
나 왔어. 호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빵 사 왔어. 맛있어 보이길래. 재우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전재우. 뭐 하냐, 씻냐?
화장실로 가봤지만 재우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나갔나...
혼잣말을 하며 식탁 의자에 앉아 빵을 먹었다. 유리와 빵집 투어를 다니며 맛있게 먹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페스츄리는 한입 베어 물면 바삭하게 부서지면서도 안이 촉촉하고 달콤했다.
좋은 버터 썼나 보네.
유리의 말투를 흉내 내며 작게 말했다. 향긋하고 부드러운 파이도 먹었다. 예술이었다.
파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나중에 유리를 만나면 정말 맛있었다고 칭찬해 줘야지. 빵을 먹으며 고개를 들었다. 닫힌 침실 문이 보였다.
‘침실 문은 여태 열어 놓고 살았는데 왜 닫혀있지.’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침실 안을 봤다. 재우가 보였다. 재우는 침대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있었다.
재우야.
재우는 불러도 답이 없었다.
야, 전재우.
재우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재우는 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우의 모습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그간 재우와 같이 약을 먹은 적도 많았고, 재우만 혼자 먹고 내가 지켜본 적도 있었지만, 이토록 재우가 축 늘어지고 쳐진 모습은 처음 봤다.
재우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웃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재우가 지금 경험하는 감정은 재우의 표정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그 너머의 것이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행복감의 폭발. 현실 세계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강렬한 행복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오로지 행복감만을 무섭도록, 으스러지도록 느끼고 있었다.
재우가 나를 봤다. 나를 봤다기보다는 내 쪽을 봤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무슨 일이야?
물어봐도 재우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재우는 몸을 천천히 무너뜨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재우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 쓴 주사기가 보였다. 나는 호흡이 헙하고 막혔다. 재우 앞에 주저앉아서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재우는 모로 누워 침을 흘리고 있었다.
어디야? 재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했다.
나 지금 하이드 파크.
알았어.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주위를 둘러봤다.
관광객들이 샌드위치나 커피 따위를 들고 삼삼오오 앉아서 늦은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커다란 골든레트리버 한 마리는 혀를 쭉 빼물고 주인과 함께 달렸다. 자전거를 탄 건장한 남자는 힘 있게 페달을 밟으며 나를 지나쳐갔다.
다들 평균의 사는 듯이 보였다. 아무런 걱정도 없어 보이는 그들이 부러워졌다. 이 푸른 하늘과 우뚝 솟은 나무에 둘러싸여 시궁창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하는 내가 처량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부모님의 대화를 들었을 때? 재우에게 전화했을 때? 아님,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이었나? 나는 어떤 선택을 했어야 됐을까? 지금의 상황보다 조금이라도 좋아질 수 있다면, 단 1센티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것 같았다.
주사기를 발견하고 나서 재우의 짐을 샅샅이 뒤졌다. 캐리어와 백팩, 작은 파우치 등 재우의 물건을 모두 바닥에 쏟아서 약을 찾았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짐이 얼마 되지 않아 꼼꼼히 보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티셔츠의 안과 밖, 바지의 주머니와 솔기까지 모두 만져보았지만 약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옆 작은 서랍을 열어보고 침대 밑도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서 들여다봤다. 나와 재우의 침대보를 벗긴 후 매트리스를 들어 올려서 어디 튀어나온 부분은 없는지 봤다. 없었다. 화장실로 가서 선반 위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봤다. 변기 수조도 열어보고 약이 들어가 있을 만한 건 모두 열어봤다. 샴푸나 바디 워시 통 안에도 없었다. 오기가 생긴 나는 주방으로 가서 쓰레기통을 엎었다. 휴지와 과자 봉투가 아무렇게나 쏟아졌다. 포장 음식을 담았던 일회용기에서는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어디 있는 걸까. 거실 한가운데 서서 고민하던 그때, 나와 재우가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벗었던 패딩이 생각났다. 나는 패딩이 짐스러웠다. 어차피 오래된 패딩이고 돌아갈 때쯤 한국은 봄일 테니 버려야겠다고 했었다. 그러자 재우는 자기도 그래야겠다며 한 번에 버린다고 내 패딩을 받아 갔고 그 이후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침실로 뛰어들어가 붙박이장을 열었다. 패딩 두 벌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옷걸이째 꺼내서 바닥에 놓고 손으로 눌러봤다. 울퉁불퉁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주머니와 안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안주머니의 솔기가 조금 뜯어져 있었다. 솔기를 힘으로 북 뜯어버렸다. 오리털이 뭉게구름처럼 삐져나왔다. 삐져나온 오리털을 움켜서 마구 던졌다. 패딩 안감 속에 손을 집어넣어 이리저리 헤집었다. 비닐봉지가 만져졌다. 잡히는 대로 꺼내어 바닥에 놓고 다른 패딩도 똑같이 했다. 알약과 가루와 물약과 주사기들... 양도 많고 가짓수도 많았다. 재우가 숨겨놓았던 약은 거의 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나는 재우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멀리서 재우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재우는 나를 발견하고는 뛰던 걸음을 줄여 짐짓 태연한 척하며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재우의 얼굴은 창백하고 수척했다. 얼굴 옆으로 흐르는 땀과 충혈된 눈, 훅 끼치는 땀 냄새가 그전까지 내가 알던 재우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떻게 했어?
재우가 물었다.
뭘.
민준아, 미안하다. 속일 마음은 정말 없었어.
......
그냥... 네가 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리고 이 생활을 끝내겠다는 내 말도 진심이었으니까. 굳이 말하지 않은 것뿐이야. 지금 있는 것만 하고 정말 끊을 거야.
재우는 약간 비굴해 보일 정도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재우가 나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재우가 사과해야 할 사람은 재우 자신이 아니던가. 나는 재우를 다그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재우가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저 돕고 싶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한 거야.
음...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 소프트한 걸로는 느낌이 잘 안 오더라고...
너 코카인 팔겠다고 할 때 다른 약들도 시작한 거야?
어...
나의 표정을 살피며 순순히 대답하는 재우를 보니 측은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미약한 배신감은 정당하지 않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받아주고 최선을 다해주었던 재우다. 재우를 탓할 권리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내가 재우를 도와줄 차례였다. 재우가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내가 나서야만 했다. 재우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재우야. 우리가 호주로 출발하기 전에 네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봐. 제대로 한 번 살아봐야겠다는 그 말 말이야. 남들처럼 사는 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한테 물었잖아. 당연히 돌아갈 수 있다고 나도 대답했고. 그걸 믿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재우는 말이 없었다.
봐봐. 주위를 좀 둘러보라고. 다들 즐거워 보이지 않아? 여기서 불행해 보이는 건 너랑 나밖에 없어.
재우는 눈을 끔벅거리며 주위를 봤다.
돌아가자. 우리, 말만 하지 말고 정말로 돌아가자고.
재우는 주위에서 눈을 돌려 나를 봤다.
여기서 결정하자. 자.
나는 가방에 달린 지퍼를 열고 확 뒤집었다. 속에 들어있던 각종 마약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재우는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이것들...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이것들이 너를 갉아먹게 두지 않을 거야.
나는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댕겼다. 쌓인 약 더미 가까이 라이터를 가져가자 재우가 황급히 팔을 뻗어 내 손을 쳤다. 라이터가 멀리 날아갔다.
당황한 나를 보며 재우가 말했다.
내가... 이것만 하고 그만한다고 했잖아.
재우는 약이 든 봉지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챙겨서 가슴에 안았다.
이것만... 이것만 할게.
재우는 약을 안고 나를 잠깐 봤다. 그리고 뒤돌아서 걸었다. 재우를 밀쳐내고 약을 도로 빼앗을 수도 있었다. 불태우든지 뜯어서 바람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약에 취해 극한의 행복감에 빠졌던 재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저 약을 빼앗으면 재우가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안 됐다. 아기를 안 듯 소중하게 약을 안아 들고 위태롭게 걸어가는 재우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조깅하는 남녀,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있는 가족들 사이로 재우가 걸어갔다. 쨍한 날씨에 총천연색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공원의 풍경 속에서 재우만 빛이 바래 희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