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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Oct 12. 2024

고독 속의 확실한 빛

너무 시끄러운 고독_보후밀 흐라발

요즘 책을 읽는 행위가 내 마음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또 가만히 있으면 읽고 싶어지는 것이 책이라서 도서관에서 또 한 차례 책 수집을 하였다.

최근에 긴 글을 읽은 후유증일까, 가볍게 짧은 글이 읽고 싶어졌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 책을 책장에서 꺼내보았다.

뒤에 적힌 설명과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소소한 평가들을 보는데, 밀란 쿤데라가 적은 한 줄이 인상 깊어 이 책을 너무 읽어보고 싶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체코 최고의 작가"

나는 아쉽지만 보후밀 흐라발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칭송하는 글귀를 본 순간 알아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약 130페이지의 짧은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p.9)"


글은 대체적으로 1인칭인 '나'가 독백처럼 읊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살아가는 동안 보고 느꼈던 것들에 대한 허무와 절망감과 더불어 해방을 꿈꾸는 작지만 강한 희망을 동시에 느끼는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의 자신을 잘 보여준다. 위의 문장은 소설의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데, 이 부분이 변주되어 악장이 시작할 때마다 나타난다. 


"한 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p.16)"


요 근래 '이방인', '부유'에 빠져 있었는데, 이방인으로 부유하는 상태와 감정이 책으로도 경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을 때 특히 심하게 드는 것 같은데 하나의 이야기에 몸과 생각을 맡긴 내가 그 세계 속에 적응하고 있는 모습이 가끔은 이질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을 직접 가담하여 만들어놓고 체험하는 행위를 벌인다.


"그러면 나는 그곳에서도, 내 압축기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고 야외로 나가는 건 아니다. 나는 이제 신선한 공기를 견딜 수 없게 되었으니까.(p.36)"


자신을 스스로 가둬놓은 이 화자는 고독에 빠져 있다. 진실에 접하고 있는 무언가에 다가간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핑계 가득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이 된 자신을 받아내기에 어려운 것이 아닐까. 이 문장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데, 그 이유가 사실은 화자도 벗어나야 함을 알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면 이렇게 희망 가득한 우울을 선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예수와 노자를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미래로의 전진)이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근원으로의 후퇴)이었다. 어떤 행위를 할 때 보는 관점에 따라 미래로의 전진일 수도 근원으로의 후퇴일지도 모른다. 사실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허무주의를 좋아한다. 끝없는 영원이라고 하는 것을 찬양한다고 말하기보다 바란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나는 비관주의에 가깝다. 그런데 '그럴 수 있지', '해 봐야지', '할 수 있겠지' 하는 말을 자주 한다. 비관적 낭만주의자일지도 모른다. 지극히 개인주의자적인. 이런 나의 성향 때문인지 나는 고독을 매우 좋아하고 반긴다. 고독 속에 파묻힌 나는 나에게 말을 거는 방법으로 고독에 금을 낸다. 사실 이 행동에 해방을 원하는 나의 마음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끄러운 고독은 나에게 거의 매일 있는 모양새이긴 하다. 물론 글의 화자처럼 너무 시끄러운 내 고독 탓에 머리가 어질 하기도 하다.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p.75)"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의 이마에는 모두 별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삶이 시작되는 순간 저마다의 내면에 싹트는 천재성의 표징이다. 그들의 시선은 힘을 발한다.(p.120)"


이 책이 매우 무척 엄청 마음에 들었던 이유가 여기서도 발견된다. 삶을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소한 희망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능력과 이를 실행할 천재성을 지닌 채 살아간다. 물론 그 상황 속에서 같이 겪는 다른 이들의 시선도 힘을 주거나 빼앗기도 한다. 현실에서 빛이 발하는 그 순간에 해방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고독에 빠진 누군가도 자신의 반짝임으로 해방을 선언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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