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혼자 해외여행 중 만난 나쁜 놈

by 뭉지

대학생활만 성실하게 했던 내가 혼자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자 부모님은 매일같이 남자를 조심하라며 입이 마르고 닳도록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공포영화의 소재로 써도 될법한 온갖 시나리오가 끝도 없이 나와서 부모님의 창의력에 놀랄 정도였다. 그리고 난 부모님의 기대에 부흥하듯이 첫 여행지인 이스탄불에서 온갖 놈들을 다 만나게 됐다.

이름하여 놈놈놈! (나쁜 놈, 좋은 놈 이상한 놈)

한 명씩 차례대로 소개해볼까 한다.


1. 나쁜 놈

이스탄불에서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체크인한 첫 숙소에서 문제가 생겼다. 바로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

4층으로 배정된 방에 배낭부터 캐리어까지 총 15kg에 달하는 짐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주인아저씨가 쓱 다가오셨다.


도와줄까?라는 말도 없이 당연하게 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척척 올라가시는 뒷모습에 감동을 받은 채로 쫄래쫄래 따라가니 4층까지 한 번에 도착했다. 오르다 보니 계단이 스프링 모양처럼 둥근 나선형으로 이어진 곳도 있어 아저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족히 30분은 걸렸을 게 분명했다. 아저씨에게 방 열쇠를 받아 들고 아늑한 방에 모든 짐을 내려두니 긴장이 턱- 하고 풀렸다. 둥지를 떠난 새에게 가장 필요한 건 새가 안전하게 모험을 할 수 있는 안락한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뽈뽈뽈 돌아다니다가 언제든지 와서 쉴 곳이 생겼다는 것은 홀로 여행을 떠난 나에게 큰 안도감을 느끼게 해 줬다. 그렇게 무사히 찾은 나만의 둥지에서 뻐근해진 허리를 침대에 뉘이며 행복한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으로 시내로 모험을 떠날 준비를 했다.

날씨가 꽤 더웠던 탓에 나가기 전에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싶어 물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보통의 숙소는 물을 공짜로 주기에 이곳도 그럴 줄 알고 1층 카운터로 내려가 주인아저씨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카운터를 계속 지키고 있는 주인아저씨를 보니 방까지 짐을 척척 옮겨주신 게 생각이 나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런 반가운 마음이 내 얼굴에도 드러나 아저씨에게 웃으면서 물 한 병을 달라고 말했고, 아저씨는 그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셨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내가 말을 마친 뒤에도 반응이 없으셔서 5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눈을 아까보다 더 느끼하게 뜨며 생각을 마친 아저씨는 드디어 대답을 하셨다.


“물을 달라고? 이 물은 한 병에 3000원인데.. 하지만 공짜로 마시고 싶다면 내 볼에 키스해줘. 그럼 그냥 줄게”

아저씨는 냉장고에서 삼다수 같은 500ml 생수병을 가리키며 돌연 자신의 볼에 뽀뽀를 해달라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아까의 그 친절했던 아저씨가 인간의 탈을 벗고, 이상한 동물 한 마리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내 눈앞에 사람이 아닌 짐승 한 마리가 찐득한 눈으로 뽀뽀를 해달라고 하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도 안 났지만 순간적으로 아저씨에게 정이 떨어져 웃고 있던 내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표정이 굳은 채로 휴대폰 번역기에 이런저런 말들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으니 아저씨가 이내 말을 돌렸다.

“알겠어. 이번에는 물을 공짜로 줄게. 대신 다음부터는 사 먹어야 해”

미안함도 없이 뻔뻔하게 말을 돌리며 아저씨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주었다. 눈앞에 보이는 물을 받을지 말지 고민이 될 정도로 아저씨의 무례함에 기분이 나빴다. 나를 만만하게 봤다는 생각에 대한 분노와 아저씨에게 웃으며 말한 것에 대한 자책이 동시에 들었다. 이대로 물을 받아 버리면 자존심이 상할 거 같은데 그렇다고 안 받아 봤자 아저씨에게만 좋은 일인 거 같아 썩은 표정으로 아저씨가 준 물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주인 아저씨가 줬던 물


혹시나 해코지를 당할까 봐 아저씨를 노려볼 수도 없었고, 항의를 강력하게 하기도 두려웠다.

여행 초보였던 나는 그렇게 아저씨에게 한마디도 못 한 채로 그 숙소에 4일간 머물렀다.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카운터를 항상 재빠르게 지나다니며 최대한 아저씨를 피하는 거 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아저씨가 3,000원이라고 말한 물은 상점에서 겨우 700원에 팔고 있었으며, 세계여행을 하면서 그 아저씨처럼 이상한 숙소 주인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 아저씨는 그렇게 내 인생 최악의 숙소 주인이 되었다)

keyword
이전 09화26년간 믿어왔던 세계의 균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