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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간 믿어왔던 세계의 균열

by 뭉지

여행 첫날, 이스탄불의 아름다움에 반해 골목길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눈앞에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진 탓이었다. 이스탄불은 지구에 숨겨진 예술 도시였다. 골목골목마다 유럽풍 건물들이 늘어져 있었고, 자동차 위에는 형형색색의 카펫이 덮여 있었다. 그 뒤로는 청량한 바다가 펼쳐져 있어 한 순간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걷던 중에 조그만 체구의 동양여자가 캐리어와 배낭을 메고 혼자 걸어 다니는 모습이 꽤나 신기한지 현지인들에게 예상치 못한 관심을 받았다. 어떤 이는 나를 지나쳐 가면서도 흘깃 뒤를 돌아보는 가 하면, 어떤 이는 다가와서 길을 잃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노천카페 의자에 앉아 여유를 실컷 즐기고 있던 어떤 할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래며 길을 잃었냐고 여러 번이나 물었다.


‘친절을 경계하라’

이런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었다. 낯선 현지인들이 나를 향해 주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하나도 반갑지 않고 오히려 반감이 들었다. 그들이 무언가 꿍꿍이를 숨긴 사기꾼처럼 보인 나는 “아임 파인 땡큐”라는 말을 던지고 도망치듯이 길을 걸어갔다. 숙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몇 번을 똑같은 곳만 빙빙 돌 뿐 숙소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면서 가고 있었기에 헷갈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똑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걸 보면서 무언가 잘못됨을 알았다. 이스탄불 시내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것이었다. ‘어떡하지?’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도 이대로 난처한 티를 내면 누군가의 멋잇감이 될 거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앞으로 걸었다. 기념품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한 상점의 상인이 말을 걸었다. “Are you lost?” 상점 앞에서 짝다리를 짚고 행인들을 구경하고 있던 할아버지 상인은 나에게 친절인지 사기인지 모를 말을 또 던졌다. 이번엔 진짜로 길을 잃었기에 시험에 빠졌다. 숙소로 가는 길을 잃었다고 말할까 아니면 아까처럼 괜찮다고 하고 도망칠까. 길을 잃었다고 말하기엔 상인에 대한 신뢰가 없었고, 도망치기엔 이미 체력이 거의 다 소진된 상태였다. 어떤 대답을 할지 고민하다가 수술한 허리가 끊길 것처럼 아파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맞아.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나 지금 ㅇㅇ호스텔을 찾고 있어”

할아버지 상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ㅇㅇ호스텔은 자신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며 옆에 있는 램프가게 상인을 불렀다. “너 혹시 ㅇㅇ호스텔 알아? 이 아가씨가 찾고 있다던데” 램프 가게 상인은 심심하던 찰나에 잘됐다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오더니 같이 고민해 주기 시작했다. “ㅇㅇ호스텔? 거기 ㅁㅁ 거리에 있는 곳 같기도 한데.. 아닌가 그 반대편인가.. ” 램프 가게 상인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자신이 길치라 헷갈린다며 길 하나를 기깔나게 잘 찾는 친구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점을 향해 ‘모하메드’라는 이름을 연신 반복해서 불렀다. 일이 생각보다 더 커지는 거 같아 당황해서 그냥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옆 가게 상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잠시만 기다리라며 아주 프로페셔널한 모하메드가 와서 널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이스탄불 길 한복판에서 두 명의 보디가드가 생긴 채로 모하메드를 기다리니 정말로 어떤 젊은 남자가 핸드폰을 들고 나타났다. 램프가게 아저씨는 모하메드가 왔으니 이제 길 찾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며 윙크를 날리며 사라졌다. 모하메드는 아저씨의 말처럼 아주 프로페셔널한 친구였다. 단박에 ㅇㅇ호스텔의 위치를 나에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여기로 직진해서 가다가 오른쪽을 보면 나올 거야”

모하메드의 말을 따라가다 보니 숙소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안도의 한 숨을 푹 내쉬고는 숙소에 들어가 무사히 체크인을 마쳤다. 저녁에는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과 다시 만나 케밥도 먹고, 모스크도 구경했다. 인원이 여러 명인 덕분에 케밥을 다양하게 시켜서 맛볼 수 있었으며, 생각보다 더 맛있는 케밥맛에 홀딱 반해버렸다. 신비로운 모스크에 가서는 가족에게 보낼 사진도 서로 찍어주며 놀았고, 언젠간 다시 만나자며 여행자다운 인사로 작별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우려했던 나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고, 예상치 못했던 도움과 행복만 가득한 하루였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땐 기분이 참 묘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지낸 세상은 뭐였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나는 26년간 강자만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듯한 세상에 살고 있었다. 정글의 약육강식 법칙처럼 나 같은 최약체가 혼자 여행을 다니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세상. 그런데 오늘 하루를 겪어보니 그것보다 더 넓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펼쳐진 새로운 세상은 말했다. "이 세상은 강자만 살아남는 전쟁터가 아니라 서로가 돕고 사는 곳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면 너도 도움을 줘.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야. 괜찮으니 마음을 조금 더 열어봐" 그리고 나는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세상이 경쟁으로 가득 차서 차가운 걸 믿기보다는 따뜻하다는 걸 믿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확신은 없었다. 믿고 싶은 것이 진짜인지 알려면 모두가 뜯어말리는 모험 속에 나를 던져야만 했다. 무서웠다. 그렇지만 끝없는 경쟁 속에서 이대로 계속 살 수는 없었고, 이대로 계속 살기도 싫었다. 알 수 없는 세상에 나를 던진 용기에 보답 받듯이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도 된다며 확신을 주는 상황들이 오늘 하루동안 연속해서 일어났다.

그렇게 내가 26년간 믿어왔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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