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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구보다 낭만적이었던 쥰 (2)

by 뭉지

'뭐? 가정주부면 남편이 번 돈으로 혼자 한 달간 여행을 왔다는 거잖아? 자기가 번 돈으로 와이프를 혼자 한 달간 해외여행을 보내주는 남자가 지구상에 존재했다고?' 놀라움에 입이 떡 벌어진 나는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쥰에게 대체 남편을 어디서 만나게 됐냐고 다급하게 물어보았다.

일본인이었던 쥰은 뉴질랜드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던 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고 했다. 뉴질랜드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자연스레 그곳에 정착하게 됐고, 자식도 두 명이나 키우며 가정주부로 살아왔다고 했다. 쥰이 남편을 뉴질랜드에서 만났자고 했을 때 나는 쥰의 남편이 그녀보다 최소 10살은 많을 것이라 예상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거의 확신하는 말투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남편이 너보다 나이가 많지?".


"아니 우리 동갑이야. 20대에 만나서 결혼했어".

순간 머릿속이 멈췄다. 아내의 자유로움을 이해해 주고, 한 달간 해외여행을 보내줄 정도라면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연상일 거라 믿었는데… 내 편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세 번째 질문까지 모두 틀려버리자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이 내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물 안 개구리’ 지금 내 모습은 딱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고 있는 틀에 박힌 개구리 말이다. 그 개구리는 자신 살던 세상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걸 전혀 상상하지도 못해 틀에 박힌 질문만 그녀에게 계속해서 던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옷차림 때문에 싱글인 줄 알았고, 혼자 한 달간 해외여행을 왔다길래 스스로 돈을 벌어서 온 사람인 줄 알았다. 남편이 있다는 말에는 그 남편이 대단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까지 착각했다. 마지막 질문은 틀에 박히다 못해 편견이 가득한 질문이라 동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땐 나 스스로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영락없는 개구리로 변한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심지어 그 모든 질문을 다정하게 대답해 준 쥰 덕분에 더 부끄러웠다. 이렇게나 착하고 다정한 사람을 내 멋대로 편견을 가지고 틀에 가둬버리려 하다니.. 고개가 푹 숙여졌다.


한 편으로는 그녀가 가진 환경이 부러웠다. 그녀와 나눈 단 몇 마디의 대화로 쥰의 가족들이 그녀의 자유로움을 존중하며 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쥰은 자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 ‘엄마’라는 이름이 자아를 지워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쥰을 보며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사랑이란 ‘안정감’을 얻는 대신 ‘자유’는 포기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면 당연히 싱글일 때 누렸던 자유로움은 사라지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쥰을 보니 아니었다. 쥰은 나에게 상대방을 믿어주고 그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는 것도 사랑이라는 걸 내게 알려주었다.


쥰을 보며 그녀가 하는 사랑이야말로 내가 무의식적으로 원하던 사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평생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낭만적인 사랑을 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동양인 여자로 존재하지만 살아가는 세상과 그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완전히 다른 게 느껴졌다. 나는 편견에 가득 차 있었고, 쥰은 그저 쥰 그 자체였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살 생각 있어?” 내 질문에 쥰은 잠시 머뭇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없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좋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왜 그녀가 일본을 떠나 뉴질랜드로 홀로 향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가 속했던 환경은 그녀의 자유로움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왔을 것이다.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냐”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며 사냐” 등 가족을 비롯한 친구들까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환경이 너무도 숨이 막히고 답답해 살기 위해 뉴질랜드로 떠났을 것이다. 쥰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개성을 억누르는 대신 자신이 가진 개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세상으로 떠났다. 그래서 쥰은 쥰이 될 수 있었다.


쥰의 말을 통해 보게 된 쥰의 세상은 나에겐 '낭만'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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