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해외여행 중 만난 이상한 놈
상상과 현실이 완벽하게 다른 순간이 있다.
안전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제일 위험한 선택이라던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나의 안전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었다던가
나를 지키기 위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나를 위험에 빠트리는 말이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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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새벽,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나섰으면서도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나는 급하게 카카오톡을 켜서 엄마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누군가 나를 급습할 것만 같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봐 주고, 언제든 경찰에 신고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엔 오직 엄마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침대에서 쉬고 있던 엄마는 바로 전화를 받아줬고, 나는 애써 웃으며 지금의 상황을 엄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엄마는 화면 너머로 "네가 진짜 미쳤구나"하며 온갖 잔소리를 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겐 필요한 건 엄마의 잔소리가 아니라 그저 나의 현재 위치를 알아서 무슨 일이 생기걸랑 경찰에 바로 신고해 줄 사람이었다.
핸드폰 하나로 엄마랑 통화도 하고, 지도로는 처음 가는 길 찾기를 하느라 길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빠른 길로 가고 싶은데 이 방향이 가장 최적의 코스도 맞는지 헷갈렸다. 긴장감을 잔뜩 유지한 채로 길을 걷고 있는데 앞에서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망했다. 망했다. 망했다!!!
도로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납치범이 타고 있을 것만 같은 차 몇 대만 살벌하게 지나다닐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마주 오는 남자가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버렸다. 표정이 굳어진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나는 상황 설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겁에 질려버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에도 남자와 나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보였고, 남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의 거리는 계속해서 더 좁혀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척 엄마와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사실은 겁에 질린 티를 내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아 아무 말이나 뱉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가 나를 빤히를 넘어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걸 인지할 정도로 가까워지자 나는 속으로 경악을 멈추지 못했다. ‘그냥 이대로 날 지나쳐서 가길.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치길, 제발 제발’ 하며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슥-
조용히 지나쳤다.
이대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남자가 그냥 지나친 것에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hey”
이 길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멈칫하는 사이에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hey”
“Do you speak english?”
“Are you lost?”
나는 당황해서 “No. No. thank you”라고 말하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남자는 나에게 다가와
“Where are you going?”
“Are you from Japan?.. Korea?” 하며 말을 끈질기게 걸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왔냐는 마지막 물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Korea?”하며 아예 내 앞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섰다.
이어 자신은 한국에서 2년간 근무를 한 적이 있다며 대뜸 휴대폰으로 카카오톡을 켜더니 자신의 한국인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부터 카카오톡을 열어 사진을 보여주는 모두 라이브로 지켜본 엄마는 내 이어폰을 향해 온갖 욕을 남자에게 뱉기 시작했다. “별 미친놈이 다 있네. 왜 코리아 거리면서 친한척이야. 꺼지라고 해. 꺼져라! ” 엄마는 자신의 딸이 즐겨보던 공포 라디오 사연의 주인공이 될까 봐 경계를 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나쁜 사람이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엄마가 자신에게 욕을 날리고 있는 것을 모른 채로 남자는 한국인 아저씨들과 찍은 사진과 나눈 대화를 계속해서 보여줬다. 한국인 아저씨들이 그에게 꽤나 친절하게 대해줬던지 한국을 정말 사랑한다고 한국에 대한 애정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한국을 향한 그의 충성심에 나는 대통령이라도 된 마냥 얼떨떨한 표정으로 “땡큐”라는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남자는 이어서 너만 괜찮다면 자신이 도와줘도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냐는 남자의 물음에 버스 정류장을 찾고 있다고 했더니 “이 방향으로 쭉 올라가서 코너가 나오면 꺾으면 돼. 가다 보면 두갈레 길이 나올 텐데 꺾지 말고 무조건 직진해야 돼” 라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남자는 마치 9살의 어린 조카를 보듯이 나에게 이해하기 쉬운 영어와 손짓까지 사용하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나를 걱정이 담긴 어조로 혼내기 시작했다. 지금 걸어온 길은 여자 혼자 다니기 정말 위험한 곳인데 왜 이 시간에 혼자 다니고 있냐며 말이다. 걸어오면서 남자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던 걸 알고 있던 나는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거렸다. 누가 봐도 혼자 여행을 처음 떠나 온 여자인 게 티가 났던 지 남자는 자신이 정말 중요한 조언을 하나 해주겠다고 했다. 그 하나의 중요한 조언은 소름 돋게도 어제 승민이가 해준 것과 똑같은 조언이었다.
“절대로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에 누군가가 말을 걸면 절대로 터키어나 영어 하는 티를 내지 마. 말을 알아듣는 척도 하지 말고, 영어로 대답하지도 마. 알겠지?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니 꼭 명심해야 해” 하며 단호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남자의 말을 들으니 심장이 쿵 쿵 쿵 하며 빠르게 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언해 주는 남자도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고, 나 또한 영어로 대답했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나는.. 나는.. 자동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남자는 나에게 위험한 상황에 영어를 쓰지 않겠다는 확인을 받은 후에도 걱정되는 눈을 숨기지 못하고 끝까지 덕담을 남겨줬다. “부디 너의 여행이 안전하길 바랄게”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처음 본 사이었지만 남자는 내 안전을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이라는 걸 짧은 시간 안에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언어가 통하지 않을까 봐를 제일 걱정한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위급한 상황엔 언어가 통하는 게 가장 문제인 경우도 있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어가 안 통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면 위험한 일이 생길까 걱정하지만 정작 제일 위험한 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영어를 쓰는 것이었다.
상상했던 것과 현실은 완벽하게 다른 경우도 있었다. 이번이 그랬다. 새벽에 혼자 길을 걷는 바보 같은 짓은 전혀 하게 될 줄 몰랐는데 내가 그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안전한 선택을 했다고 믿으며 숙소를 옮겼지만, 그곳이 빈민가였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위험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길에서 만난 은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새벽의 길거리에서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고 떠난 남자는 그렇게 이스탄불에서 만난 이상한 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