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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싱그러운 여름에 받은 대수술

인생은 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by 뭉지

열여덟의 맑고 후덥지근한 여름방학.

친구들은 학원에서 수학문제를 풀고 있을 때, 나는 막 인생의 숙원 사업을 끝낸 참이었다.

열여덟이 무슨 인생의 숙원 사업?

그만큼 비장한 마음으로 끝낸 숙원 사업은 바로 ‘척추측만증‘ 수술이다.


척추측만증


중학생 때부터 조금씩 휘기 시작한 허리는 어느샌가 수술이 필요한 50도를 훌쩍 넘겨버렸다.

엄마는 의사에게 원인을 물었다. “자세가 안 좋아서 그런 거죠?”

평소에 나에게 자세를 똑바로 하라던 엄마는 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원인이 없다고 했다.

“원인이 없다고요?”

엄마는 당황해하며 믿지 못하겠는 표정을 지었다.


의사는 ‘특발성’이라는 단어를 붙이며 정말로 원인이 없다고 했다. 자세 때문도 아니라고 했다.

그를 돌팔이라고 치부하기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척추측만증 수술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문가였고, 우리는 비전문가였다.


그렇다. 진짜로 원인 따윈 없었다. 단순히 운이 안 좋았을 뿐이었다.

운이 보통 안 좋은 게 아니라 대단히 안 좋아서 수술을 할 만큼 휘어버린 것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이전처럼 나에게 자세를 똑바로 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저 가엽고 안쓰럽다는 표정을 간간이 보여줄 뿐이었다.


친구들보다 한쪽 등이 유난히 튀어나와 있다는 사실은 사춘기 소녀에게 꽤나 민감한 일이었다.

여드름 하나가 생겨도 학교에 가기 민망했던 나에게 몸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됐다.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다. 친한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아버리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볼까 봐 혹은 불쌍하게 대할까 봐 두려웠다.


내가 살았던 세계의 학교는 소문이 참 빨랐다.

“누구랑 누구가 사귄대~!’처럼 사소한 친구들의 가십거리마저도 큰일이 일어난 것처럼 소문이 금방 퍼져나갔다. 나 또한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낄낄 거리면 친구들과 말하기도 했다.

그게 지루하던 학교생활의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소문이 두려워 척추측만증 수술 한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여름방학에 조용히 수술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될 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학교 생활을 하려고 했다.

평소보다 더 자신감이 생긴 채로 친구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꽤 기분이 좋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수술하고, 아무렇지 않게 학교생활을 다시 할 작정이었다.


‘이제 더 이상 허리가 휜 채로 살지 않아도 되겠지’

병원의 이동식 침대에 누워 차가운 수술실로 들어갈 때는 설레는 마음까지 들었다.

수술시간이 6시간이나 걸린다는 무서움보다는 휘어버린 척추가 펴진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묵은 콤플렉스가 드디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저의 수술 전, 수술 후 척추 사진입니다.)


기대에 부흥하듯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무사히 회복해서 학교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몸이 회복하기까지는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

2주 정도면 충분히 회복하고도 남을 시간인 줄 알았는데 택도 없었다.

미처 몰랐던 보통의 삶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을 정도로 인생 최고의 고통을 선물 받은 수술이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이렇게 무서운 단어였는지 몰랐다.

‘죽을 만큼 아프다’라는 말의 무게를 열여덟 청춘에 이해하게 될 줄도 몰랐다.


수술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파 죽겠다’라는 말을 달고 살고, 침대에서 혼자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엄마는 결단을 내렸다.

“은지야 너 이대로는 학교 못 가. 당장 다음 주가 개학인데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이 몸으로 책가방은 어떻게 들려고?”

불안한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그런 내 눈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고등학교 1년 휴학하자”

“…”

“그리고 내년에 복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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