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손님은 도연언니였다. 홀로 세계여행 중이라는 언니는 조용하고 저렴하게 머물 곳을 알아보다가 여행 커뮤니티에 내가 올린 글을 발견했다고 한다. 언니는 큼지막한 여행자용 배낭과 앞가방을 메고 홀로 집 앞까지 찾아왔다. 조그만 전자책을 가지고 다니며 늘 책을 읽던 언니는 종종 흥미로운 얘기를 해주기도 했다.
“한 살씩 나이 먹을수록 시간이 왜 빨리 흘러가는지 알아?”
“음…글쎄??”
모든 게 낯설지 않고 익숙해서 그래. 뇌가 그렇게 처리한대. 신기하지? 처음 하는 것들이 많아지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
언니의 말처럼 다합에서의 하루는 늘 빠르게 흘러갔다. 그저 먹고, 자고, 싸기만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하루가 끝났다. 처음엔 이 단조로움이 좋았지만, 언젠가부터는 마음 한편엔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동기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론가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텐데 나는 돈과 시간만 쓰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생각 없이 킨 인스타그램에서 친한 친구의 취업소식을 발견했을 땐 축하함과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조급함이 들어 결국 상담 요청을 했다.
“언니 잠깐 시간 돼?”
“그럼~ 무슨 일인데??”
언니를 붙잡고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토해내듯이 쏟아냈다.
“대학생 때 이런 적이 한 번 있었어..”
동기들 보다도 친하게 지내던 언니오빠들이 있었다. 대외활동을 통해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늘 그들이 하는 얘기를 귀담아 들었다. 토익 점수, 인턴, 취업 등 대학에 가지 않은 친언니에게 듣지 못하는 얘기들을 이 언니오빠들은 해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미리 걸으며 시행착오를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날도 한 언니가 국내에서 손꼽히는 병원에 취업했다는 소식에 모두가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기뻐야 할 언니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좋긴 한데.. 너무 빨리 취업된 거 같아. 워홀같이 이때만 해볼 수 있는 게 있을 텐데 그걸 이제 못한다니 아쉬워.” 그 얘기를 들은 한 오빠는 언니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는 지금 오히려 이득인 거야. 자 시간을 돈으로 생각해 보자고. 네가 일하는 동안 돈은 계속해서 쌓일 거야.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쓰는 거지. 그럼 그 격차를 생각해 봐.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나가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일 년에 몇천만 원씩 손해 보는 거라고.”
“그러게. 그렇게 생각하니 맞네”
그 얘기를 들은 언니의 얼굴은 화색이 돌며 금세 밝아졌다. 안줏거리를 우물거리며 가만 듣고 있던 나도 그 말이 퍽 효율적이고, 맞는 말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나는 어느새 취업을 했을 때의 언니오빠들의 나이가 됐고, 그저 잠깐의 에피소드로만 여겼던 기억을 도연언니에게 풀어놓았다.
“옛날에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내 이야기가 아닌 거 같아서 별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생각나는 거 같아. 친구들은 취업하고 커리어를 쌓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모아둔 돈만 쓰는 거 같아서… 내가 진짜 손해 보고 있는 걸까?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는 잠자코 들어주고 있던 도연언니를 흘깃 쳐다보았다. 언니가 세계여행이라는 꿈을 위해 직장을 박차고 나온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내심 기대하던 말이 있었다. ‘그런 말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보다 늘 먼저 경험한 언니오빠들의 말이 진실인 것처럼 믿고 살았기에, 이번에도 도연 언니의 입을 통해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런데 언니는 되려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은지는? 여기 온 거 후회 돼?”
“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안 떠났을 거야?”
“.. 아니! 시간을 되돌려도 난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 같아.”
“왜?? “
“그때는 정말 간절했거든. 차라리 세계 여행을 하다가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눈앞의 현실이 너무 벅차고 힘들었어.”
“맞아. 그거야. 너는 이미 알고 있네.”
언니는 나에게 스스로 묻게 해 줬다. 그리고 내가 왜 여행을 떠났는지 다시 한번 더 상기시켜 주었다. 맞다. 나는 오래된 꿈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나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애초에 효율적인 세상에서 손해 보는 게 정말로 두려웠다면, 여행을 떠나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처음의 간절했던 마음을 언니덕에 다시금 떠올리게 됐다. 언니는 빠르게 감기려던 나의 시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주었다.
그녀는 시간을 가치 있게 쓰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