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는 늘 거실 소파에 누워 이야기를 나눴다. 머리 위로 번지는 조명의 노란불빛은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처럼 항상 속내를 꺼내놓게 했다. 그즈음 나는 웅이가 20살부터 5년간 근무했던 삼성전자를 퇴사하고 세계여행을 떠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너무 힘들었던 거야?”
“아니. 사람들 다 좋았어”
“아~ 그럼 일이 너무 힘들어서 퇴사한 거야?”
“아니. 일도 적성에 맞았어”
“그럼 왜 퇴사한 거야?”
“인생 살면서 한 번쯤은 좋아하는 일에 도전해보고 싶어서.”
어느 날 밤에는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넌 세계여행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뭘 하고 싶어?”
“바리스타! 커피를 좋아해서 카페에서 일해보는 게 로망이야. 누나는?”
“글쎄.. 잘 모르겠어. 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 식품영양학과를 나와서 영양사 면허증까지 따긴 했는데 이 길이 진짜 내 길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자꾸만 들어. 나에게 더 잘 맞고 재미있는 길이 있을 거 같은데 그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야. 그래서 이렇게 하나씩 도전해 보고 있는 거 같기도 해. 지금 이 경험들이 내 미래에 대한 힌트가 돼줄 것만 같아서”
또 어느 날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하나도 신경 쓰지이 않거든.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니까 마음의 거리도 멀어져서 더 자유로워진 기분이기도 하고. 그런데..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모르게 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움츠려들까봐 걱정돼. 돌아가면 여기서 배운 것들을 금방 잊고 또 불안에 떨면서 지내면 어떡하지?”
“그럼 지금부터라도 연습하면 되지! 그리고 누나는 이미 스스로 깨닫고 변한 게 많잖아. 지금 이렇게 집 구해서 사는 것도 그렇고. 누나는 변화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게 내 눈에는 보이는데?”
“맞아. 여기 다합 살면서 느낀 건데 인생 살면서 제일 노력해야 하는 건 외적인 성취도 좋지만, 내가 가진 신념이나 생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거였어. 그것만큼 가장 소중한 게 없더라. 그걸 잊지 않고 싶어 “
“누나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정말? 나는 확신이 안 드는데”
“응! 누나를 못 믿겠으면 누나를 믿는 나를 믿어봐”
웅이는 내가 우리 집이 운영하는 마지막날까지 왼쪽 침대자리를 지켜주었다. 그 기간은 자그마치 4달이나 되었다. 처음엔 한 달에서 끝날 줄 알았던 하우스 운영은 생각보다 공실이 적은 탓에 계속해서 운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시끄러운 분위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와 장기 숙박을 해준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너무 무모한 선택 아니야?”
내가 내린 결정이 추상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추상적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같은 이유로 응원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덕에 나는 막연한 생각을 현실로 바꿔나갈 수 있었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과 행동만 있다면 상상도 못 했던 도움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나는 정말로 백만 엔 걸 스즈코처럼 이집트에서 원하는 만큼 살아 볼 수 있었다.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스즈코는 여행지에서 백만 엔을 모았지만 나는 엄마의 백만 원을 몽땅 써버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