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이 재미없는 대학생
그게 딱 나였다. 소심한 성격 탓에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로 돌아와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있기만을 반복했다. 누워있으면서 행복하면 문제 될 게 없지만 나는 꼭 시간을 낭비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맞나..?'
척추측만증 수술을 한 뒤로 생긴 인생 가치관이 하나 있는데 바로 ‘후회 없이 살기’
고통스러운 수술 후, 걸음마부터 다시 배울 때 스스로 다짐했었다. 몸이 회복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후회 없이 살기로. 그런데 지금 내가 하는 걸 보면.. 이건 좀 아닌 거 같았다.
지금처럼 하루하루를 재미없이 보내는 건 후회 가득한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생 신분일 때만 할 수 있는 재미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시작은 새내기 때 아랍에미리트에 한국 청소년 대표로 열흘간 파견을 나가는 대외활동이었다.
보여줄 게 없는 평범한 새내기가 한국의 청소년 대표로 뽑히니 그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로망 가득했던 해외파견 활동이라 더 설레었던 마음도 있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들었다. 모든 과정이 다 기대되고, 재미있을 거 같았다.
그렇게 전공 수업을 들을 때는 볼 수 없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파견활동에 열정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춤 한 번 제대로 춰본 적 없는 내가 팀원들이랑 몇 시간씩 아리랑 춤을 연습하는가 하면, 서울에 있는
값비싼 한복집에 무작정 들어가 한복을 협찬해 달라고도 했다. 파견을 가서는 무엇을 보고 배웠는지 매일 일지에 기록했으며, 파견이 끝난 다음에는 그걸 바탕으로 청소년 문화센터에 찾아가 홍보까지 했다.
그랬더니 최종심사 때 우수파견단으로 선정됐다며 한국의 태극마크가 들어간 ‘장관상’을 턱 하니 주셨다.
‘장관상’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장관상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저 좋아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한 활동이라 힘든 것도 딱히 몰랐다. 재미있어 보여 지원을 했고, 재미있었기에 열심히 했더니 장관상이 주어진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지루한 전공 공부에서 도망치듯이 선택한 대외활동으로 좋은 성과를 얻게 되자,
‘이거다!’하며 머리에 전구가 띵-하고 켜진 느낌이 들었다.
이 경험으로 내가 진짜로 관심 있고, 재미있어 보이는 걸 하면 그 진심인 마음이 성과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지루한 전공을 살려 취업하기가 벌써부터 두려웠던 나에게 대외활동은 새로운 적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다.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넣을 수 있는 스펙은 덤이었다. 그렇게 대학교 3학년까지 대외활동에 미쳐 살았다. 머리에 전구가 켜진 직감 또한 틀리지 않았다. 이 대외활동들로 장관상을 한 번 더 수상했으며, 공모전 금상에 해외문화원장상까지 평범한 대학생이 갖기 힘든 스펙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전공 공부에만 집중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최종 성적을 만들었으며,
‘영양사 면허증’이라는 보험까지 따고 학사모를 던지며 후련하게 졸업했다.
아빠는 졸업식에 와 졸업을 축하한다며 이제 안정적으로 취업을 할 일만 남았다고 말해주셨다.
아빠의 말처럼 내가 가진 학벌과 스펙은 안정적으로 취업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술도 안 마시고 학교 생활을 성실히 한 탓에 무엇하나 발목을 잡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력서에 쓸 수상이력은 차고 넘쳤고, 지원서에 쓸 내용도 많았다.
성과를 낸 경험? 갈등 관리 경험? 실패 경험?
누군가는 할 말이 없어서 쥐어짜 내야 한다던데 나는 차고 넘쳐서 가장 임팩트 있는 양질의 내용들만
쏙쏙 뽑아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취업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왜?
모든 걸 소진한 상태로 졸업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취업시장에 들어가 더 큰 경쟁을 하기엔 난 이미 경쟁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