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계열사 협력이 꼭 결혼생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서로 같이 모이기만 해도 설레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햇수가 거듭될수록 각자에게 점점 불만도 생기고 오해도 쌓여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 계열사끼리 신혼 초로 돌아가서 서로 감사하고 이해하려고 조금씩만 더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사는 ‘오해말고 이해로!’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날 회사의 계열사 임원분들을 모시고 진행한 워크숍에서 내가 했던 건배사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좋은(?) 말 같지만, 저런 건배사를 하기까지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어쩌다가 과장 나부랭이 주제에 사장님, 부사장님 등 높으신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풀어놓자면 이러하다.
화학회사에서 담당했던 업무 중 하나는 ‘화학 계열사 협력’ 업무였다. 당시 회사는 국내 큰 대기업 중에 하나로서, 수십 개의 계열사가 있는 회사였다. 계열사들은 화학과 관련된 회사들, 전자와 관련된 회사들, 서비스와 관련된 회사들 등으로 업종에 따른 분류가 있었다. 그중 우리 회사와 같이 화학기술을 다루는 네 개 회사의 연구소 간 협업을 통해 시너지를 내는 업무가 바로 ‘화학 계열사 협력’ 업무였다.
연구소 간 협업은 주로 기술 교류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A사가 개발하였으나 B사에는 없는 기술을 B사에 제공하여 그것으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형태가 있었다. 혹은 C사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기술적 이슈를 D사의 전문가가 자문해 주어 해결해 주는 형태도 있었다. 이 업무의 담당자인 내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계열사 간 협력을 장려하는 일이었다. 또한 회사들 간에 이루어지는 협력 내용을 파악하고 업데이트해서 각사의 연구소장 등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했다.
계열사 협력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4개 사의 참여 연구팀들이 모두 신이 났다. 비슷한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타사의 기술에 대해 배우기도 하면서 유대감이 형성되는 듯 했다. 실제 협력을 통해 새로운 제품이 시장 출시까지 되면서 협력에 대한 의지는 더욱 고무되었다. 그러나 몇 년 간 협력을 진행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어느 날 협력 진행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우리 연구팀에 연락을 해보니, 그쪽에서 하소연을 해왔다. 우리 연구팀이 원래 해야 하는 현업만으로도 바쁜데, 타사에서 너무 빈번하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계열사 협력의 형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일방적인 도움의 모양새로 흘러갔다. 즉, 계열사 중에서 가장 규모도 크고 맏형인 우리 회사 연구팀들이 타사 여러 팀에 자문을 제공하고 도움주는 협력이 대부분이었다. 상호 주고받는 협력이 아니라 주로 일방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도와주어야 하니, 우리 연구팀 쪽에서는 점점 부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제발 협력에서 자기 팀은 빼달라는 간곡한 부탁까지 해온 것이다.
타사 연구팀에서도 하소연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루빨리 기술적 이슈를 해결해서 연구내용을 진척시켜야 하는데 우리 연구팀이 연락이 잘 안 된다고 했다. 빨리 도와달라고 전화나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늦고, 만나고 싶어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타사 연구팀은 우리 연구팀과의 협력에 간절하게 매달려 있었다.
협력을 장려해서 성과를 내야 하는 관리자 입장인 나로서는 난감했다. 어떻게든 협업이 계속 진행되게 만들어야 했다. 양사의 어려움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기에 어느 한쪽만 푸시하기도 어려웠다. 그저 서로 도와서 좋은 성과를 내면 좋을 것이라는 명분만 앞세워서 양쪽 연구팀들을 달래었다.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며 열심히 달래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해결책을 몰라서 끙끙 앓다가 기껏 생각해 낸 방법이라는 게 그렇게 건배사를 한 것 뿐이었다. 그냥 늘 하던 일을 열심히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만 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무지했다. 한마디로 그 업무에서 더 나은 성과를 내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그 회사를 퇴사한 뒤 한참 뒤에 읽게 된 책에서 당시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발견했다. 유진녕, 이성만 작가의 저서, ‘연구원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협업을 촉진하기 위한 방법들이 기술되어 있었다. 협업 촉진을 위해서는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협업을 촉진하는 실질적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그것들은 평가(협업 관련 평가 항목 추가), 포상, 리더의 역할 등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그 당시 내가 했던 일이 협업의 중요성 강조하는 것 뿐이었다. 이 책에서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저 ‘서로 협력하고 도우면 좋은거잖아요.’라는 명분만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정말 필요했던 것은 좀 더 제도적인 장치였다. 예를 들면 타사를 도와주는 우리 연구팀에 인센티브(보너스)를 주기를 상부에 건의한다던가, 협력과 관련된 평가 항목 추가를 제안하는 일 등 말이다. 이러한 내용을 그 당시 알고 적용했더라면 좀 더 협력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았을까.
업무에서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냥 ‘열심히’ 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이 잘 되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해야 했다. 말로만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잘 돌아갈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맡은 업무에 대한 새로운 공부 없이 기존에 내 머리에 있는 상식으로만 열심히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지속한다면 단기간에는 성과를 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후퇴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말처럼, 이미 퇴사해놓고 이렇게 깨달아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소 잃은 빈 외양간이라도 고쳐놓아야 다음에 또 새로 가축을 들였을 때 후회할 일이 없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퇴사 후에도 계속 고민하고 공부를 이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