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여백을 남겨 두어야겠다.

by 리유


사무실 창문 밖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처럼 온몸의 세포들도 축축 아래로, 저 바닥으로 늘어진다.

아침부터 갑작스러운 보고준비로 온 집중을 쏟아 내서일까.

오늘은 기필코 정시에 퇴근하리다.




결국 칼퇴근의 기대감을 뒤로하고 여전히 푹 꺼진 몸과 함께 운전대를 잡는다.

눈을 수없이 깜빡여 보아도, 연신 비벼대 보아도 시야가 희뿌옇다. 가슴도 답답해져 온다. 차 안의 모든 창문을 최대로 열고 온몸에 공기를 들여 넣어 본다. 잠시 뿐이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아직 1시간이나 남았다. 몇 번의 큰 숨을 내쉬어도 갑갑함이 겹겹이 쌓여 이제 목 끝까지 올라온다.

나는 지금 움직이는 작은 감옥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그것도 나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간 감옥에서.



수고한 차의 시동을 꺼주고 나니, 곳곳에 퍼져있던 긴장도 푹 꺼지는 듯하다. 의자에 기대 스르르 몸을 아래로 내려본다. 하. 이렇게 온몸에 힘을 빼 주었던 게 얼마 만인가.

인스타 릴스와 뉴스들을 하염없이 보다 보니 20분이 훌쩍 넘는다. 시간을 유용하게 쓰겠다며 멀리해 왔던 모습이었다.

에잇.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사람이 어떻게 매일 열심히 살아.

오늘은 애들 공부도 봐주지 말자, 운동도 하지 말자, 저녁은 냉동볶음밥으로 때우자.


차 문고리에 간신히 손을 뻗어 감옥 문을 열었다. 딸각.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누런 빛의 얼굴과 실핏줄이 가득한 눈의 40대 여자가 거울에 비친다.


“너, 잘 살고 있는 거 맞는 거니?"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고민하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 본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다짐하지 않았는가.


현관문 앞에 섰다. 평소에는 입꼬리를 애써 올려 보며, ‘나는 좋은 엄마다. 아이들에게 힘찬 모습 보여주자’ 다짐하곤 했었다.

오늘은, 나의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보여주자 생각해 버려 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들은 각자 책상에 바르게 앉아 줌 수업을 듣고 있다. 착실하게 집중하는 모습이 새삼 고맙다.

먼저 퇴근한 남편은 침대에 늘어져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저렇게 허송세월을 흘려보낼까 했었을 거다. 아마 눈빛으로도 전해졌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당신도 그럴 수 있겠다. 쉬고 싶겠다. 속으로 말해본다. 웃으며 손 흔들어 주니 왜 저러냐는 표정이다.


수업 끝나기까지, 30분,

공부 체크, 운동, 샤워 전속력으로 해치웠던 시간이다.

느긋하게 하자. 온전히 나에게 내어주자.


오랜만에 거칠어진 각질도 좀 닦아내주고, 푸석해진 머리칼에 트리트먼트라는 것도 묻혀 주었다. 몇 달간 방치해 둔 바디로션도 발라본다. 방으로 들어와, 유통기한 한 달 남은 팩을 뜯어 얼굴에 찹찹 붙인다. 헤어 에센스도 머리칼 가닥 한가닥에 문질러 본다. 살랑살랑 찬 바람에 물기를 날려 보내며 북스탠드에 놓인 책의 문자들을 읽어 내려간다.

시원한 바람에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온 방 안을 채운다.


아, 좋다.





최근 몇 달간 내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집에 오면 마치 적들을 상대하는 사람 마냥 할 일들을 쳐냈다. 어깨에는 늘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숨조차 빠르고 얕게 쉬어댔던 것 같다. 식탁에 앉아서도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축 처진 입꼬리에 숟가락을 갔다 대며 다음 할 일들을 떠올렸다. 계획했던 일들은 모두 했다. 하지만 정작 소중한 내 아이들, 남편에게는 어떠했는가. 눈 맞춤조차 거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걸 내려놓기로 작정한 오늘,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눈빛, 인사를 받아주는 남편의 웃음, 어딘가에 안기고 싶은 내 마음까지 보였다.






지친 마음이 먼저 말을 걸었다.

좀 쉬어가라고.

잠시 멈춰보니 알겠다.

내 삶에 여백이 없었다는 것을.


아이들도 멋지게 키워내고, 화목한 가정도 이루고 싶다. 일에서도 성공하고 싶다.

그러려면 보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쉬지 않고 달리다 보면 모든 걸 스스로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가끔은 이렇게, 내 삶에 여백을 남겨 두어야겠다.

그곳에 느긋하고 차분하게 앉아

놓치고 있던 빛들을 찾아봐야겠다.

그 빛으로 내 마음을 따스하게 비춰주어야겠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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