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1
'이거 좀 해줄래?'
'넵'
'저거 좀 해줄래?'
'네, 알겠습니다'
'그거 한 다음에 이것도 부탁해.. 고마워'
'..... 네'
20대 때의 내 별명은 ‘미스터 예스(Mr. Yes)’였다.
당시, 나는 이제 막 7년 간의 긴 유학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2년 정도밖에 되지 않던 때였고, 한국 사회에 빨리 적응을 해야 했지만, 한국에 친구도 거의 없던 나는 한국에서의 대학교 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다만, 몇몇 선배들과는 옛날부터 알던 사이였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 선배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어떤 일을 맡기거나 부탁을 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면서까지 그분들의 일을 도와드렸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한국 생활 적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한국의 대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내가 적응을 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정했고, 입대를 하여 정확하게 2년(730일)을 복무했다. 군대에서 나는 한국생활에 완벽하게 적응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군대에는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말 신기한 사람들도 역시 많이 모여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인간상을 옆에서 보고 경험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것이 나의 국가인 대한민국에 다시 적응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내가 군대에서 제대하여 이제 막 복학을 했을 때, 나는 학교와 관련 있는 어느 사회단체에서 한 학기 동안 학점을 받으며 봉사를 하였는데, 주로 나보다 평균적으로 10살은 높은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그분들은 당시에 한참이나 어렸던 나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가장한 명령 같은 말투로 종종 어떤 일을 부탁하곤 하셨다. (내가 그때 20대 중반이었으니까, 그분들의 나이는 당시에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나보다 먼저 봉사를 시작하신 좋은 분들이라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들의 부탁을 들어드렸는데, 나중에 그분들이 나에게 하는 대부분의 부탁들이 원래는 그분들에게 할당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는 그분들의 부탁을 조금씩 거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분들은 현재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여러 가지 패턴의 꼰대 멘트를 나에게 날리면서 간접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는데, 예를 들면, '내가 처음 여기에서 봉사를 시작할 때는 이런저런 시키는 것들도 다 했어'라던가, '젊은 사람이 그렇게 어른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면 쓰나?', 또는 '어른들이 시키는 것은 다 젊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거야. 네가 나중에 사회에 나와보면 알 거다'등이 거의 그분들의 단골 멘트였다.
옛말에 '10번 잘해도 단 한 번 잘못하면 지난 10번의 잘한 것들은 모두 잊는다'라고 했던가? 그들은 마치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그들의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는 사실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 같았다. 네다섯 명의 어른들이 나 하나를 두고 하루 종일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는데.. 나는 정말 그곳이 군대보다 더 심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군대는 열심히 잘하면 마음 없는 격려나 칭찬이라도 잠깐 해주는데 말이다.
그렇게 나는 하루아침에 '미스터 예스'에서 '미스터 노우(Mr. No)'로 나의 노선을 바꾸었다.
원래, 처음 내가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고 그 형님(?)들도 나를 왠지 살갑게 대해 주었을 때는 내가 그들의 그룹과 금방 마음을 나누는 사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렇게 봉사를 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서로 도와주며 격려하는 것이 몸에 베여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를 멀리했다. 봉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주기는 개뿔!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의 그룹에 속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그 봉사단체에서 내가 하던 작업은 국내의 많은 좋은 분들이 보내주시는 중고 의류들과 신발, 및 일상생활에 가정에서 필요한 작은 물건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박스에 담아서 트럭에 싣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박스에 나누어 담은 후에 국내 또는 해외의 불우이웃들을 위하여 보내지게 되었다. 그래서, 약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하고 나면 마치 한 시간 동안 택배 상하차 알바를 한 것만큼의 피로도가 쌓였다.
그렇게 혼자서 묵묵히 봉사를 하던 3주째 어느 날, 그 무리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형이 내 쪽으로 와서 커피를 내밀며 "좀 그렇지?"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친해지게 되었는데,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 그룹은 이미 3년 이상이나 그곳에서 봉사를 해왔고 각자의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며, 지난 3년 동안 수많은 대학생 봉사자들이 다녀갔지만, 거의 대부분은 약속한 봉사일 수를 채우지 않고 학점만 받고 도망갔으며, 어떤 학생은 일주일도 제대로 일하지 않고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대학생 봉사자가 오면 아예 처음부터 그들만의 방식으로 봉사자를 시험해 보고, 그 후에 봉사자가 도망가면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했고, 끝까지 정직하게 봉사하면 나중에는 잘해주며 친해진다는 것이 그 형님의 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그 사람들의 사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나도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오래 유학을 했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국에서의 적응기간, 그리고 군대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는 것 등을 그날 그 형에게 말해 주었다. 그렇게 그 형과의 유대감이 생기자, 그다음 주부터는 남은 학기의 기간 동안 그 30대 중반의 다섯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로 도와가며 재미있게 봉사할 수 있었다.
요즘은 '나에게 조금 손해가 되더라도 경험이 되기 때문에 괜찮아'라는 마인드가 거의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군가를 조금 더 돕는다던지, 또는 내가 손해를 조금 본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손절각을 잡곤 한다. 사회가 더욱더 개인주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위의 일을 경험하기 전까지 나는 무조건 "Mr. Yes"였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철저하게 나에게 맞춘 계산적인 예스맨이 아니었나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오히려 한 번쯤은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도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내가 속한 단체와 사회를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나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매번 "No"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번쯤은 "Yes"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쩌면 우리에게 모든 질문에는 단 하나의 대답만이 존재한다고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1번부터 4번까지의 선택지 중에서 정답인 하나의 선택지만 고르는 교육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이 가진 환경과 배경, 및 그 배경을 통하여 배운 경험이 존재한다. 그리고, 각 사람의 인생에는 단지 하나의 콜링(Calling)이나 사명만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1 더하기 1은 2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1+1=2와 같은 공식을 모두 적용할 수는 없다.
'미스터 예스'가 '미스터 노우'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다섯 명의 어른들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들도 역시 나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던 시간이 나를 다시 "미스터 예스"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 혼자만 그들의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나의 일을 분담하여 서로의 할 일을 서로서로 도와주는 관계로 발전하였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Yes or No
#자원봉사
#사회생활
#이해관계
#꼰대
Q: 여러분은 Yes와 No 중에서 무엇을 더 자주 말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