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입도
22.12.21: Day 6,
입도의 날이 밝았고, 새벽 4시부터 카운터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5시 15분 정도 되자 직원들이 카운터에 들어와 주섬주섬 책상 위로 서류들을 꺼내기 시작했고, 잽싸게 줄을 선 후 20달러를 내 TCT 카드를 발급받았다. (잃어버리면 재발급이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전자화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인터넷에 나오는 정보와 일맥상통하게 입도 시 그리고 출도 시 딱 두 번만 확인했는데, 분실 위험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어 공항 입구 기준으로 우측에 위치한 공간에서 수하물 추가 확인 절차를 거쳤다. 캐리어 및 가방에 음식 및 식물 씨가 있는지를 구두로 질문한 후 X-ray를 거쳐 통과시키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생태계의 보고, 진화론의 발상지로 꼽히는 갈라파고스이기에 조금 더 철저한 검사를 기대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검사 자체는 너무 허술했고 (막말로 검사소에 들어가기 전 밖에 씨를 빼놓았다가 다시 가방에 넣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애당초 검사소가 입국장 밖에 덩그러니 있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산크리스토발 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비행기에 올랐다. 기차처럼 과야킬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타는 시스템이 신기했지만, 그뿐이었다.
4시간 정도 날았을까 옆에 황량한 섬이 하나 나타났고, 그 섬이 바로 갈라파고스였다. 하늘 위에서 맛본 설렘도 잠시, 생물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비행기는 착륙했다.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하늘이 약간 흐렸던 것도 있겠으나 사방이 동물 천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 공항 주변의 환경은 괴리가 컸고, 100달러를 납부하고 다시 한번 허술한 입도 심사를 거치며, 아까운 돈만 날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털레털레 캐리어를 끌고 20분 간 걸어 숙소에 체크인을 완료했다. 이제껏 방문했던 그 어느 관광지와도 다르게 길거리에 드문드문 현지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 관광객은 공항에서 벗어나자마자 거의 보이지 않았고, 파리 앉은 여행사들만이 본 섬이 여행지라는 점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여행자가 적으면 보다 현지의 분위기에 동화되기 쉽다는 점에서 나쁠 것은 없었으나, 그 수가 여행지로써의 가치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할 만큼 적어도 너무 적었기에 께름칙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침대에 눕고 나서 보니 허망했다.
여행의 시작에서 되려 난 끝을 생각했다. 괜한, 필요 없는 생각들이었지만, 막상 시작되니 우울함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번듯한 직업과 명패, 성공이라는 미명을 위해 다시금 돌아가 손에 쥔 모래처럼 흩뿌려질 내 젊은 나날들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얕거나 반복적인 경험만을 해오며 죽여온 시간들, 학업과 경력에 매몰돼 죽여갈 시간이 이미 흘러나가는 듯했고, 아득히도 길 그 시간의 무게가 나를 짓눌러왔다.
물컵에 물이 반 차 있거나 비어 있든 간에 물컵이 깨질 것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으로서 이미 컵의 윗부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균열을 역행하기는 너무나도 어렵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나는 두려웠고 동시에 고독했다.
섬이 기대와 달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계획이 틀어질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함,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외딴섬에 내던져지기를 자처한 여행자의 고독함이 나를 옭아맸고, 침대에 눕자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닌 일탈으로서의 일상을, 그 속의 무한한 자유를 갈구해 왔고, 동시에 그 괴리에 절망해 왔다.
이역만리 떨어진 대양에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서야 조타 능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된 나는 약하기 그지없는 평범한 인간일 따름이었다.
침대에 누워 짧은 시간 동안 그간 학업을 지속하며 길게 이어왔던 고민들을 깊게 반추하며, 내 삶의 항적을 되짚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무력하고 불안해하며, 고독한 인간이었고, 인간이며, 인간일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불완전한 삶의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 거부하되 포기하지 않으며, 반항하는 것, 순간순간을 살아가며 끝없이 고뇌하고 질문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체득하며, 우선 할 수 있는 것들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밀도 있는 시간들로 삶을 채워나가자는 의지를 새롭게 다졌다.
앞으로 다가올 나날들이 두렵다면 더더욱 현재에 충실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긍정적인 도피 정도로 정리하고 싶다) 호스텔 로비로 나왔다.
이미 최악이던 대학 생활에서 벗어나 대지에 두 발로 오롯이 서게 되었는데 오지도 않을 미래에 대해 생각하며 우울해하는 것은 분명 비합리적인 행위였고, 이성이 감정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자 그래도 정신이 들었다.
밖으로 걸어 나오니 흐렸던 하늘도 어느새 맑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