뒹굴거리고 누워만 있는 생존형 백수, 바다사자
22. 12. 21: Day 6,
지도를 확인해 보니 걸어서 가볼 만한 해변이 총 4개 정도 있었다. 가장 가깝고 바다사자들이 많이 머무르는 Playa De oro부터 놀기 좋은 작은 해변인 Playa Mann, 바다사자뿐만 아니라 바다 이구아나와 펠리컨 등도 볼 수 있는 Playa Punta Carola, 그리고 스노클링 스팟으로 알려진 Playa Tijeretas까지.
로컬 식당에서 가볍게 세비체로 끼니를 때운 후 먼저 배들이 늘어선 해변으로 나섰고, 목재 펜스를 따라 5분 정도 걸었을까, 시야에 수십 마리의 갈라파고스 바다사자들이 들어왔다.
걷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등딱지가 빠알간 갈라파고스 붉은 게 몇 마리만 보이다 갑자기 백과사전에서 그림으로, 다큐멘터리에서 영상으로만 접하던 바다사자들이 여유롭게 누워있는 광경을 마주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멸종위기종이기에 사람들의 접근을 엄격히 차단했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완전히 배치되게 배 정박지 위 의자에 누워있거나 심지어 배 위에 올라가서 휴식을 취하는 바다사자들도 많았다. 나중에 숙소로 돌아가 호스트한테 들은 바로는 바다사자와 3m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권장 사항이나 선착장의 통로를 막고 있는 경우 슬쩍 뛰어 넘어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몇 분이고 난간에 기대 가만히 바다사자들을 둘러보았다. 어미를 따라다니는 아기 바다사자들,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며 즐겁게 헤엄치는 몇몇 바다사자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평평한 바위 혹은 선착장 위에 누워 햇볕을 쬐는 나머지 바다사자들까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바다사자였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을 정도로 내키면 물에 들어가고 그저 누운 채 가만히 빈둥거리는 바다사자들이 정말 부러웠다.
물이 차가워지기 전에 입수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Playa Tijeretas로 발걸음을 옮겼다. 섬 자체가 넓어서 그런 것인지 간간이 눈에 띈 도마뱀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동물들을 관찰하지 못했다. 하얗게 바래진 나무들이 현무암으로 추정되는 돌들 사이사이로 자라나 있었다. 갈라파고스 국립공원 내부도 풍경은 비슷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어 티헤르타스 전망대에 도착했다. 위에서 산호 군락이 속속들이 보일 정도로 물도 맑았고 전망도 끝내줬지만, 사실 5년 만의 스노클링을 할 생각에 설레 별 감흥은 못 받았다. 사진만 급히 찍고 뛰어 내려갔다.
운이 좋은 날에는 바다거북도 볼 수 있다고 들었으나 물이 예상보다 차가웠기에 객관적으로 큰 이점을 가진 포인트는 아니었다.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날카로운 바위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웅덩이 속 물을 홀짝이는 샛노란 작은 새의 사진도 한 장 찍었고,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와 식겁하게 했던 바다사자와 물속에서 처음으로 교감하기도 했다. 계단에서 햇빛을 받는 바다이구아나도 목격했다.
수영하기에는 물이 너무 차갑다고 느껴지자, 몸을 끄집어내 발걸음을 옮겼다.
수건을 달리 가져오지 않아 웃통을 깐 채로 맨발로 다음 해변까지 걸어갔는데, 발바닥을 타고 대지의 열기가 올라와 내가 오롯이 두 발로 땅을 딛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어 도착한 Playa Punta Carola는 바다사자와 새의 천국이었다. 해변 입구부터 바다사자 두 마리가 누워 길을 막고 있었고, 괜한 접촉을 피해보려 수풀 근처로 걸으려 하면, 그 수풀 아래도 바다사자들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새들의 사냥 장면도 직접 목격했다. 푸른 발부비들이 수면에서 1~2m 정도 위로 저공비행을 하다 물로 쇄도해 먹이를 낚아챘는데 여럿이서 동시에 물에 뛰어드는 모습이 신기했다.
이어 Playa Mann으로 발걸음을 옮겨 시원한 갈라파고스 맥주를 한 병 비웠다.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았는데 요리조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쫓는 부모들과 어미를 쫓는 아기 바다사자들이 주는 대비가 유쾌한 해변이었다.
인근 식당에서 문어 요리를 한 접시 비우고 근처 여행사에서 다음 날 투어와 배편을 예약했다. 한없이 우울했음에도 하루의 끝자락에서 뒤돌아보니 그 어느 때보다 여행의 자유를 만끽한 알찬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