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릿 항공, 플로리다 공항, 환장의 콜라보
2023. 1. 7: Day 22 + 1,
모든 승객을 탑승시킨 후 정비 문제로 출발 자체가 취소되었던 나폴리 발 취리히행 루프트한자 항공편, 80%의 극악무도한 연착률을 내게 선사한 이지젯, 위즈젯, 라이언에어 등의 유럽 저가항공편, 그리고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질겅질겅 껌처럼 씹히는 비린 닭고기를 필두로 최악의 기내식을 내놨던 노르스 애틀란틱 에어웨이 항공편에, 연착을 일삼으면서 늘 좌석을 날개 옆에 배치해 멍청하게 웃는 동물의 낯짝이 화를 돋웠던 프론티어 항공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일주일이 멀다 하고 비행기를 타며, 어처구니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말도 되지 않는 기이한 비행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으나 개중에서도 아직도 생각만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경험이 하나 있다.
플로리다 포트로더데일 발 애틀랜타 허치필드잭슨 행 NK 1078편.
나와 스피릿 항공 간의 기나길 악연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첫 연착이라고나 할까.
저가항공 이용하지 말라는 조언을 우습게 여겼던 나를 반성하게 했던 최악의 비행 경험...
모든 문제는 미국 이민국과 포트로더데일 공항으로부터 시작됐다.
한국인에게 관광 비자를 요구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의 입국 심사 줄을 과소평가한 게 패착.
애틀랜타 허치필드잭슨 공항을 통해 입국했을 당시 입국 심사에 1시간이 소요됐기에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히 환승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 내 잘못이었다.
다만 짧은 시간 내에 환승이 가능하냐고 물었던 내 질문에 가능하다고 답했던 스피릿 항공 직원의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을 원한 게 아니다. 직원이라면 포트로더데일 공항의 상황을 모를 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 내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연착으로 악명 높은 스피릿 비행기답게 우선 비행기는 10분에서 20분가량 늦게 출발했다. 불행의 전조였을까.
이후 공항에 착륙해 입국심사 줄을 서기 위한 대기줄에서만 45분을 허비했다.
코로나 이후 인력 충원이 아직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공항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게 직원의 요지였는데, 돈을 벌자니 비행기는 받아야겠고, 인력이 충원되지 않아도 고객들의 대기 시간만 늘어날 뿐 결과적으로 공항 측의 피해는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철저히 갑의 위치에서 승객과 직원을 유린하는 포트로더데일 공항의 작태가 가증스러웠다.
줄을 서기 위한 줄을 건너 줄을 서서 입국 심사관 얼굴을 보기까지 3시간을 더 기다렸다. 그 와중에 애틀랜타행 스피릿 비행기는 추가로 연착돼 (역시 명불허전 스피릿) 실낱같은 희망으로 나를 고문했다.
결국 입국 심사를 다 마친 것은 비행기가 떠난 지 30분 후. 45분의 줄만 아니었다면, 코스타리카에서의 연착만 아니었다면, 이번 여행은 무슨 돈으로 다녀왔냐는 둥 입국 심사관의 불필요한 질문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비행기에 탑승이 가능한 시간이었기에 더욱 열이 뻗쳤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 비행기는 떠나갔고, 결국 내게 남은 선택지는 가장 빠르게 출발하는 비행 편을 잡아타는 것.
비행 편 재예약을 위해 스피릿 항공 카운터를 찾았다.
또 한 번 나를 맞이한 긴 줄. 공항이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별로 길다는 생각도 안 들었지만, 실제로 줄은 꽤 길었고 엉망이었던 직원들의 일처리 덕분에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고객에 대한 존중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직업에 대한 책임의식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줄이 길고 피곤하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손님을 앞에 두고 과자를 뜯으며 수다는 도대체 왜 떨어대는 것인가. 그 시간에 티켓 예약이라도 해주면 줄이라도 줄텐데.
최악의 항공사답게 일처리 역시 대단했다. 21세기, 현대사회의 일처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와 집중력. 할 일이 없으면, 줄이라도 정리를 하든, 퇴근을 하든, 수하물 찾는 것을 돕든, 아니면 가만히 어디 앉아 있기라도 하지, 굳이 입국 심사장까지 이어져 있는 긴 줄을 뻔히 알면서, 이미 승객들이 3시간에서 4시간 기다렸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 불난 집에 기름이라도 들이붓고 싶은 것인지, 그나마 티켓 예약을 도와주던 직원에게 말을 계속 걸어대 결국 관심을 얻어내던 행태는 꼴불견이었다.
1시간 30분 정도 기다렸다. 저 옆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떠들던 직원을 지나쳐 그나마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직원에게로 향했다.
내가 처음 제시받은 것은 워싱턴, 볼티모어를 거쳐 애틀랜타로 들어가는 비행 편. 각 공항 대기 시간이 8시간이 넘어갔고, 총 비행시간도 20시간을 초과했지만, 개강이 코앞인 상황에서 빨리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기에 뭐든 일단 타고 가자는 마인드였다.
그렇게 내가 해당 항공편에 탑승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갑자기 직원이 명시된 티켓의 가격이 해당 비행편의 가격보다 저렴하기에 나를 태워줄 수 없다는 헛소리를 해댔다. 싸다고 해서 남는 돈을 줄 것도 아니지 않으냐며 반박했더니, 고객님의 체력이 걱정된다는 궁색한 변명을 해댔고, 이에 체력은 충분하고 공항 노숙보다는 낫겠다고 받아쳤더니, 티켓이 팔렸다나 뭐라나.
결국 그렇게 3일 후, 월요일에 출발하는 티켓을 발권받았다. 스카이스캐너에 여타 공항으로 들어가는 항공편이 널려 있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짜증 났던 건, 자신들이 저가 항공사임을 강조하며 - 서비스 보면 저가지, 고가겠냐 - 그 어떠한 보상도 제공해 줄 수 없다고 한 것. 기대도 안 했고, 항공사만의 책임은 아니었기에 따질 생각도 없었으나 막상 핀잔주듯 얘기하는 모습을 보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공평하긴 한 건지, 이후 그 누구에게도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하진 않았다.
미국인이 사랑하는 해변가 휴양지로 유명한 포트로더데일의 특성상 당일 저녁 알아본 1박 숙박 비용이 최소 150달러였기에, 시내로 향하겠다는 마음은 깔끔하게 접고 결국 공항에서 노숙했다.
공항으로도 우버 이츠 배달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을 제외하고는 소득이라고는 전무했던, 스피릿과의 악연이 시작되었던 하루.
잠을 청할 곳을 찾아 1시간여를 이리저리 장소를 바꿔가다 결국 어느 벤처에 몸을 뉘이고 무릎을 쪼그린 채로 새우잠을 잤다.
익일, 시내로의 왕복 우버 비용 50달러와 박 75달러 호스텔과 공항 노숙 사이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잠에 들었다.
다소 황당해 하며, 상당 부분 격노에 부들거리며, 그렇게 내 첫 해외 배낭여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