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의 이유

인생 첫 해외 배낭여행을 반추하며,

by 노마드

갈라파고스로, 중남미라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야겠다 결심한지도 어언 1년이 되어간다.


작년 이맘때쯤의 나는 쿠바로 갈지 (미국 입국 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못 갔다...), 생면부지의 과테말라로 떠날지, 우수아이아에서 땅끝에 다다를지에 대해 룸메이트 녀석에게 신나게 주절대다, 결국 어릴 적 그저 경이롭게 다가왔던 갈라파고스의 자연을 마주하기로 결정했었다.


코스타리카를 시작으로 바하마, 니카라과, 과테말라, 도미니카 공화국,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바티칸, 독일,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벨기에,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몰타, 키프로스, 미국, 불가리아, 룩셈부르크, 포르투갈령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 튀니지, 그리고 이번 주의 루마니아까지 25개국을 돌았다.


그럼에도 철저히 홀로 해외로 떠났던 나의 배낭여행은 '처음'이었기에 여전히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배낭여행 도중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기억을 되짚어가며 쓴 글들을 읽어내리니 감회가 새롭다.


어찌 저리도 무모했던 건지, 어디서 공항에서 밤을 보내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말을 붙일 용기가 난 건지, 되지도 않는 스페인어로 얼굴에 철판을 깐 채 그 많은 끼니를 주문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다 보면, 으레 혼자 여행해야 하는 이유, 돈을 얼마 써댔지만 후회는 없다, 경험이다 등의 미사여구로 소비적 여행을 포장하는 릴스를 자주 마주하게 된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떠남에 있어 변명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 나는 떠나고파 떠났고, 떠나고파 떠날 것이다.


학생의 신분임에도 원체 많이 돌아다녔기에,


이제 처음 푸에르토리코 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꽉 거머쥐었던 좌석의 팔걸이, 갈라파고스 입도 첫날 혼자 침대에 누워 고독을 실감하며 떨군 눈물 몇 방울이 묻어난 베갯잇, 그리고 친구 녀석이 내뿜는 자욱한 담배 연기 아래 들이켰던 맛대가리 없는 코스타리카의 맥주만이 드문드문 생각이 날 뿐,


사소한 해프닝과 나눴던 대화들이 달리 기억나지도 않는다. 가끔 글을 들춰보며 웃음 지을 뿐.


내가 떠나온 곳이 얼마나 각박한 곳이던가.


퇴사를 하지 않고서는 떠남을 꿈꿀 수 없고, 몇십 년짜리 족쇄에 갇혀 수없이 스스로를 착취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 노력과 보상에 족하다면 그 또한 그의 선택이겠지만 - 떠날 수 없어 떠나지 못하고, 미련하게 우물벽을 기어 오르내릴 뿐이다.


코흘리개 어릴 적 내게 세상은 부모님이었고, 머리가 조금 더 커진 뒤 내게 세상은 책이었다. 이제 내게 세상은 세상이다.


누구는 내게 여행의 교훈을 물었고 누구는 내게 떠남의 동기를 물었다.


진부하디 진부하지만,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경험하며 삶의 방식을 배웠고, 그중 하나에 나를 끼워 맞출 이유도 없다고 답하거나,


번아웃이 왔다느니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느니 여러 답을 해왔지만,


이젠 그저 슬쩍 웃어 보이며, 한 마디를 건넬 뿐이다.


일단 떠나봐


지난 5월 뉴욕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친구와 영상통화로 나눴던 얘기. "군에 있을 때 그렇게 떠나겠다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떠났네."


결국 중요한 건, 남는 건 - 이유가 무엇이든 - 내가 떠나기로, 그리고 떠나보내기로 결정해, 떠났다는 사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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