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09: 내일의 태양
예정대로라면, 우리는 만나지 않을 터였다.
도버 해협에서 파리까지, 그리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너가 사는 파리와 내가 머무는 메쓰의 거리는 그만큼 멀고 또 멀어, 우리가 만나려면 나는 그 거리를 달리고 또 달려 너에게 닿아야 했다.
주말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나와 달리 너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학교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끼니를 해결한 후 음악을 조금 만지다 잠에 드는 하루. '궁금할 게 없는 하루였다.'라고 나는 기억한다.
그럼에도 그 주의 나는 누군가를 절실히 찾고 있었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아, 잠시 기대 머물다 떠날 수 있는 누군가를. 곡기를 끊어가며 이불속으로 침잠하던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당시, 스톡홀름 여행을 취소한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파리행 버스표 두 장뿐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가을 방학 동안 미뤄둔 과제를 처리하기엔 마음이 심란해 집중할 수 없었다는 핑계도, 부모님과 통화할 때면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나와 들킬 것만 같았다는 변명도 할 수 없다. 사람에 다쳐 사람이 필요했고, 그 순간 때마침 너가 거기 있었을 뿐. 사뭇 이기적이지만. 그뿐이다.
이미 사놓은 파리행 버스표가 아까웠고, "너는 책을 좋아하니 파리에 와서 셰익스피어 서점에 한 번 같이 가보면 좋지 않을까?"라는 제안 역시 거절하기엔 달콤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사람이 고팠다.
그럼에도 전날까지 결정을 미루다, 자기 전, 내일 오후 3시 셰익스피어 서점 앞에서 보자는 문자를 남기고 떠났다.
그런 내게 넌
"A demain. (우리 내일 봐.)"
그날의 프랑스는 비구름에 덮였고, 비를 뚫어내지 못한 버스는 길에 주저앉았다. 다시 한번, 창가에 앉아 맺히는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봤다. 밀라노에서 돌아오는 길, 터널만 지나치면 숨죽여 울던 나는 이제는 울 기력도 없이 쇠약해져 그저 창에 고개를 비스듬히 뉘이고, 뿌연 창밖만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하늘이 서럽게도 울어댔다. 버스 타이어가 터지고, 교외전철을 잘못 잡아타고 나니, 당초 1시간 30분 전에 파리에 도착해, 카페에 앉아 너를 기다렸을 나는 결국 약속에 늦고야 말았다. 너는 그런 나를 웃으며 마주했다.
Bonjour
그리고
안녕
너를 보러 가는 길, 나는 전철에서 우는 여자를 만났더랬다.
텅 빈 눈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던, 전철이 땅밑을 지나가도 그저 서서 오래도 그 어둠을, 아니 그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던 묘령의 여인.
맵시 좋은 검은 스타킹에 맞춰 페어링 한 굽 높은 검은 부츠, 가을을 안아 든 갈색 치마와 세련된 버버리 코트 속 하얀 니트. 그리고 그 속의 옅은 하늘빛 셔츠. 파리지앵의 표본.
팔에 서류가방을 낀 채, 창밖을 한참이고 바라보던 여인은 열차가 멈춰 서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오자 나를 바라보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얼굴을 들어 눈을 깜빡이곤, 입을 앙다문 채 거둔 시선을 다시 내게 맞춰왔다.
굳이 그녀의 번진 마스카라에 눈길을 주지 않더라도, 고통스럽도록 천천히 돌아가는 그녀의 약지에 끼인 반지를 흘긋 보지 않더라도, 그녀의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이리저리 튀어나온 서류들, 부스스한 머리와 반쯤 열려있는 부츠의 지퍼만으로도.
그녀 역시 나의 아픔을 읽을 수 있었던 걸까. 핼쑥해다 못해 패인 볼, 풀린 지도 모르는 채 널브러진 신발끈, 비에 젖어 이리저리 날리는 머릿결만으로도.
그녀는 영혼이 둔중하게 패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참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왜인지 속내를 읽은 것만 같아 죄스러워 그녀의 미간을. 그리고 그녀는. 물끄러미 미끄러지면서도 진득하게 들러붙는. 심연의 골짜기로 떨어져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과 그 아래 녹진한 진창이 무너지며 합쳐져 헤어 나올 수 없어 아득한. 마주할 수 없이 공허한 시선을 칠흑 같이 검은 눈동자에 담아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왼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볼을 따라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었다.
휴지를 찾아 가방을 뒤적이던 나를 다시금 현실로 돌려보낸 건 기계적인 "La prochaine station est Saint-Michel Notre-Dame." 방송. 열차는 멈춰 섰다.
여인을 뒤로하며 나는, 작게 그러나 또렷이,
“The sun will rise again tomorrow.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예요.)”
라는 말을 던지곤, 둥그렇게 뜬 눈에 처음으로 다른 감정을 담아 나를 바라보던 여인을 떠나보내고 서점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비와 파리처럼 어울렸다.
나는 카뮈와 헤세를, 너는 사강과 에르노를 좋아했다. 우리는 선불교와 티베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욤 뮈소의 1차원적 로맨스에 대해, 운명적 사랑과 필연적 사랑에 대해 떠들어댔다.
서점을 나와 너와 걷다 보니 센 강엔 자홍빛 노을이 내려앉았고, 나는 내일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웃음 지으며, 마찬가지로 파리 어딘가에서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그녀를 떠올렸다.
59 Rivoli를 찾아 현대미술에 대해 토론하고, 너가 좋아하는 식당에 가 감자 그라탱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 넌 내게
"밤의 루브르를 본 적이 있어?"라고 물어왔고
나는 그런 네게
"아니. 갈까?"라고 답했다.
밤의 루브르는 고요했다. 가끔 드문드문 찾아오던 관광객의 인적마저 끊기자 온 루브르가 우리의 것이었다.
난 루브르의 모든 작품을 1분씩 본다 한들 24일이 걸린다는, 넌 루브르가 혁명 당시 감옥으로 쓰였다는,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제야 잠에서 깨어나는 파리의 밤이 내뿜는 소음. 그 웅성거림은 이미 멀어진 사이렌처럼 흩어져 갔고, 가끔 하늘을 훑고 가는 에펠탑의 조명만이 시곗바늘을 움직였다.
"너무 좋다." "저번이랑 다르다." "너무 평화롭다."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다." "파리의 밤하늘에서 별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너한테 물어서 오기를 잘했다." 잠시 재잘대던 우리들. 그 짧은 얘기마저도 이내 루브르의 밤에 녹아나 사그라져 갔다.
하염없이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루브르의 중앙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다, 하늘을 바라보던 서로를 바라보았다. 별 품은 너의 눈은 루브르의 밤하늘을 안아 시리도록 푸르게 반짝이고 또 반짝였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고, 모든 걱정과 고통이 바스러져 하늘에 흩뿌려져 박힌 것만 같았다.
한참을 앉아있다 다시 관광객들이 찾아와 주변이 부산스러워지자 우리는 피라미드를 거쳐 역으로 향했고, 선로로 내려가기 전,
떠나가는 너를 마주하며, 나는
"내일 파리의 하늘은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내게 장난치지 말라는 듯 싱긋 웃으며,
"흐리면 어때?"
"걱정 마. 맑을 거야."라고 넌 답해왔다.
너의 말대로, 그리고 나의 바람대로, 금요일의 파리는 맑았다. 너는 나를 마중하기 위해 베흐씨로 왔고, 우리는 잠시 근처 카페에서 핫초콜릿 두 잔을 주문해 마시며 둘의 유치한 입맛에 대해 떠들다, 짧은 이별 인사를 건넨 후 다음을 기약하며 떠나갔다. 그날의 나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토요일의 하늘은 다시 흐렸고, 일요일에는 기어코 비가 추적추적 내려 내일의 태양은 어제의 바람일 뿐이었다. 메쓰에서 파리의 마력은, 루브르의 밤하늘은 멀고 또 멀뿐이어서, 나는 그 거리를 달리고 또 달려 도무지 닿을 수가 없었다.
일요일 새벽 4시 38분, 나는 다시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옆구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