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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Sep 21. 2024

여행 후 정신과 상담

 2023. 11. 07: PTSD

밥 할 기력이 없어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더니 구역질이 났다. 시뻘건 건 다 비릴 것만 같았고, 이후 몇 시간이고 변기를 잡고 헛구역질을 하다 다시 침대에 누워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이 빙글 돌았다. 이대로 잠에 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다시 변기를 잡고 속을 게워냈다. 헛구역질을 하다 몸을 침대에 던져 까무러치면 해가 저물었고, 다시 일어나면 또 새벽 4시 38분.


알람 없이도 정시에 일어날 수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던 내 몸뚱아리. 그 비루한 덩어리가 저주스러웠다.


하루종일 굶고 있으니, 이러다 죽겠다 싶어, 그 길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이번에는 밥을 지어먹었다. 쌀알이 딱딱해 도무지 씹을 수가 없었다. 4일을 죽만 먹으며 버텼다. 몇 방울 떨어뜨린 참기름과 간장이 그리도 역했다. 뱉어내다 못해 끄윽거리며 토해냈다.


교수들에게 메일을 돌리고, 침대에 누워서 가끔은 울다, 가끔은 멍하니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정 울적해지면 책을 읽으며 3일을 흘려보냈다.


이대로 고여, 인생이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 결국 희극의 끝은 비극인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 무엇보다 고작 강도 한 번 당할 뻔했다고 모든 의욕을 잃은 채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내가 한심스러워 혐오스러웠다.

결국 스톡홀름 여행을 취소하고, 기숙사 단칸방의 사(死)기를 피해 파리로 떠났다. 교수에게 다음 주 월요일 학교에 갈 테니 정신과 의사와 상담할 수 있도록 만남을 주선해 달라는 메일을 남기고, 예정돼 있던 물리 시험을 어떻게 겨우 쳐낸 후, 떠났다.


파리에서 친구를 만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심했던 게 패착이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설산의 마력은, 밀라노의 망령은 오래도 남아 나를 괴롭혔다.



교수님께,


안녕하세요. 현재 COE 2001을 수강 중인 항공우주공학과 2학년 임채현입니다. 어제 (11월 5일) 밀라노에서 메쓰로 돌아오던 중 새벽 4시에서 5시경 겪은 끔찍한 일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 메일을 보냅니다.


당초 밀라노가 마약 거래상 혹은 가끔 눈에 띄는 소매치기 외에는 안전한 도시인 데다, 제가 악명 높은 니카라과 및 과테말라 등을 비롯한 국가를 연내 30개나 여행했기 때문에, 밀라노 역시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며 밤거리를 걸었던 게 패착이었습니다.


새벽 4시 30분경,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이 차에서 내리더니 저 멀리서부터 저를 쫓아오기 시작했고, 발걸음을 빨리 하자 칼을 꺼내 들고 이내 15분에서 20분 동안 저를 끈질기게 따라오더군요. 처음에는 괴한이 저를 노린다는 확신이 안 섰으나 이후 같은 길을 돌고, 건널 필요도 없는 횡단보도를 똑같이 걷는 모습을 확인하니, 그 남자가 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새벽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결국 저는 가장 가까이 있는 호텔의 문을 두드리며 들여보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호텔 직원은 트램을 타거나 정 불안하면 호텔 문 앞에서 기다릴 것을 권유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호텔 문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매니저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제 팔을 잡아끌고는 밖으로 나가서 아무도 없음을 확인시켜 줬습니다. 그가 아무도 없다며 뒤로 돌아본 그 순간, 나무 뒤에서 괴한이 머리를 슬쩍 내밀었고, 순식간에 눈 세 쌍이 교차하더군요. 이후 호텔 매니저는 제 뒤를 봐주겠다며, 10에서 15분 간 직원들과 함께 호텔 앞을 지켜줬고, 이후 저는 다시 떠나 밀라노 중앙역을 거쳐 메츠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오늘 아침 새벽 4시 악몽과 함께 잠에서 깼고, 최선을 다해 학교에 나가고 수업을 들었지만, 아직 사건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그 밤의 장면들이 계속 떠올라 고통스럽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강의를 듣고, 물리 세션에 참가함과 더불어 익일의 시험을 준비하며,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는 제 모습을 계속 발견함에 따라 교수님들께 상황에 대한 양해를 부탁드리는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간 저는 항상 다양한 문화와 풍경을 경험할 수 있었던 점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해 왔고, 제가 결국 현재 겪고 있는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극복할 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종국에 이 사건은 제 여행에 대한 결의를 더욱 강하게 함과 더불어, 제가 전보다 경각심을 갖추고 더 나은 회복탄력성을 갖춘 채 여행하도록 도와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겪었던 상황을 다른 학생들이 겪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 아래, 안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 경험을 다른 학생들한테 공유해주셨으면 하는 게 제 마음입니다.


추가적으로, 이번 사건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제가 활용할 수 있는 학교 자원이나 지원 방안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 정도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게 처음인지라 제가 느끼고 있는 공포에 대해 공유하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임채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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