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05: 꿈과 현실
조지아에서의 시간은 꿈만 같았고, 이탈리아에서의 시간은 꿈만 같았으면, 그저 꿈이었으면 했다.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늘 좌절했다. 거처만 두고 정처 없이 방랑했다. 집은 잃어버린 지 오래.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나를 맞이하는 스산한 냉기가 몸서리치게 싫었다.
나를 좌절케 하는 것은 여행이라는 달뜬 이상과 일상이라는 처진 반복의 간극이었다. 그 대비가 그리도 극명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멍하니 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저 위 침상은 어디로 사라졌나 한숨 쉬고, 누가 들어와 인사를 건네며, 어디서 왔냐며, 불을 켜도 되나며 조심스레 물어주길 괜스레 기대했다. 야행을 마치고 혹 동료 여행자의 단잠을 깨울까 살포시 닫히는 문고리의 불가피한 철걱임과 사뿐히 내딛는 뾰족 구두의 똑딱임이 그리웠다.
쿠타이시에서 밀라노로, 밀라노에서 취리히로, 취리히에서 바젤과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기어코 메쓰에 도착한 나의 하루는 어느 여행의 끝과 다르지 않았다. 라면을 끓여 밥을 말아먹고, 책을 조금 읽다 빈 천장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다. 소년은 여행을 그리워했고,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꿨다.
새벽 4시 반, 잠에서 깼으나 무시하고 다시 이불속에 몸을 파묻었다. 8시 25분 수업에 맞춰 7시 50분에 기상해 샤워를 마치고 8시 10분에 기숙사를 나선다. 도착해 수업을 듣고, 목요일까지 그 짓거리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창 밖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11월 프랑스의 하늘은 흐렸다. 한동안은 해를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프랑스 사람조차 따분히 여기는 공업 도시 외곽에서 아침의 등굣길은 한산했다. 겨울에 다가가는 가을바람에 코트의 깃을 여미고 자박자박 돌길을 걷고, 대로변을 조금 더 지나면 학교 건물이 나올 테 였다.
그렇게 걷던 도중 인기척이 나 뒤를 돌아보니 친구가 안부 인사를 건네왔다.
"Lim, how was your break?" "가을방학 어땠어?"
순간, 친구의 얼굴 위로 복면이 겹쳐 보였다.
얼버무리듯 답변하고 최대한 빠르게 도망쳤다.
수십 개의 손이 아스팔트 바닥에서 솟아나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아, 신발끈 풀린 사람이 달음박질치다 끈 밟아 넘어지듯 허물어지며 도망쳤다.
복면 뒤의 광소가 두려웠다. 추위에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그 손에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쥐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점심을 먹었던 것 같다. 꿈을 꿨던가. 긴 잠을 청했던가.
흑백으로 옅어져 깜빡이며 점멸하는 시간 축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다, 오후 3시, 일어나 보니 오전의 시간은 온데간데없고, 머리맡의 베개는 축축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다.
지난 밤의 강도는 이제 트라우마라는 복면을 뒤집어쓴 채 나를 쫓기 시작한 모양이고, 이제는 도망칠 곳도 없다. 안으로 숨고 또 숨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