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04: 귀향
기차가 터널 안으로 들어갈 때면 나는 얼른 눈물을 훔쳤다. 타인을 믿을 수 없어, 타인의 친절이 달가울 수 없었다. 달가울 수 없는 손길을 피하려 하니 오래, 펑펑 울 수가 없어 서러웠고, 서러우니 눈물을 참을 수 없어, 터널만 들어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이 흘렀다.
기차는 무심히도 달렸다. 코모를 거쳐, 루가노를 거쳐, 취리히에 이르기까지. 바덴을 거쳐 바젤에, 스트라스부르에 그리고 종래에는 메쓰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북부에서 스위스로 이어지는 험준한 중앙 알프스의 산맥만이 나의 눈물을 가려주었을 뿐, 프랑스에 다다르자 나는 울지도 못했다. 울 수도 없었다.
그건 안도감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차창에 내린 짙은 우울. 사선으로 비스듬히 일렁이는 열차의 노란 등이 그려낸 상 속 아이의 광대는 축축히도 젖어 있었다.
친한 친구 몇에게 넌지시 말만 던져놨다. 밀라노에서 부주의로 강도를 당해 죽을 뻔했노라고. 가족은 한국에 남겨두고 후안무치하게 혼자만 돌아다녔던 벌을 받은 것일까. 수능을 코 앞에 둔 동생으로 예민이 극에 달한 그들은 지금의 이 순간에는 완전한 타인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염치로 그들에게 털어놓겠는가.
삭히고 삭혔다. 억울하고 분함이 삭히고 또 삭히니 토해낼 수 없는 응어리가 되어 숨이 막혀왔고, 그저 두려운 순간의 기억만은 방울져 가끔 밖이 어두워지면 흘러내렸다.
우습게도 나는 회피로 기억에서 도망치려 했다. 밖의 경관을 멍하니 바라보니, 가끔 창에 공포에 질린 눈동자 하나 맺혀, 화면에 천착했다. 화면 속의 책을 읽으니 생각은 덜했지만, 그마저도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 화면에 내 눈동자의 상이 걸리면 나는 눈을 감고 그저 기억이 방울져 흘러내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바젤로 가는 길에 산사태로 철로가 끊겨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놓쳤다는 한국인 가족을 만났다. 첫 해외여행을 큰 마음 먹고 유럽으로 왔다는데 대책 없는 억척스러움이 한국인다웠다.
기차, 비행기, 버스 등 가능한 모든 선택지를 알려드리고, 학생 할인을 이용해 버스값도 2만 원 깎아 예약을 마쳐드리고 나니 내가 살아있기는 한 것 같았다.
약소한 성의라며, 작은 빵과 커피를 건네받아 마셨다. 반년만에 커피를 마시니 정신이 명징해지는 게 그래도 내가 살아있기는 한 것 같았다. 반년 만에 동향 말이 들리니 내가 살아있기는 한 것 같았다.
바젤 역에 도착한 후 15분 내로 출발하는 버스에 그들을 태워보냈다. 아이 둘과 버스 정류장까지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뛰어가니 내가 살아있기는 한 것 같았다.
기차는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메쓰에 도착했고, 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보니 다시 혼자였다. 끓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지워내며 잠을 청했다. 살아남았으니 된 것 아니냐며 자신을 위로했다.
심리적 영향은 싸그리 무시한 채. 증상이 보다 명약관화해진 것은 그 다음 날의 아침이었다. 죽음의 마수에서 벗어난들 그 후유증은 오래 남아 나를 한참이고 좀먹고 갉아먹을 태세였고, 나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돌아온 월요일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