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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ug 28. 2024

칼 든 괴한에게 쫓겼다

2023. 11. 04: 밀라노, 목숨값

전 골목 아니 그전 골목부터,

초록 비틀은 결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


전 골목 아니 전전 골목부터 아니 아마 한참 전부터...

코너를 돈 후 속도를 높여 따라붙는다.


대로 복판에 멈춰 선 비틀,

새벽 4시 밀라노의 거리는 한산하고,

이내 가방 멘 남자 하나가 내린다.


뒤집어쓴 복면에 새하얀 흰자위만 보일 뿐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검은 장갑의 그 손으로 꽉 거머쥔 날붙이 하나는 빛을 흘려내고, 날은 시퍼렇게 벼려져 있다.


그저 걸었다.


얄궂게도 풀린 신발끈에 행여 발이 엉키기라도 할까 봐,

눈치챘다는 듯 도망치면 성큼 쫓아와 서걱 벨까 봐,

두려움에 발이 땅에 들러붙어 떼지질 않아,

발을 빠르게 놀릴 뿐, 뛸 수조차 없었다.



새벽 네 시, 비 내리는 밀라노의 밤공기는 차갑고, 텅 빈 거리는 스산하며, 빗웅덩이를 훑고 지나가는 타이어의 파열음이 간간이 적막을 깬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공원 옆 대로 복판에 낡은 비틀 한 대가 정차한다. 차에서 내리는 건 입가에 복면을, 머리에 비니를 뒤집어쓴, 검은 장갑 속 손으로 무언가를 꽉 쥔 남자 하나다.


정차한 비틀과의 거리는 멀지도 그렇다 한들 가깝지도 않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번호판의 글씨가 흐리다. 이내 비틀은 제자리에서 기수를 돌려 역주행하며 사라지고 남자는 걷기 시작한다.


기묘한 불안에 산보하듯, 그마저도 부족해 달음박질하듯 발을 놀리나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어쩐지 들리지 않아야 할, 이미 멀어졌어야 할 발걸음 소리뿐이고, 뒤돌아 확인해 보니, 두 블록은 떨어져 있던 남자와의 거리는 이제 한 블록 남짓이다. 빗물을 밟으며 다가오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귀를 때린다.


좌로 한 번, 한 블록 지나 또다시 한번. 구태여 건널 필요가 없는 횡단보도까지 신호 따위는 무시하고 두 번이나 건넜지만, 결국 가능성이라는 희망은 확신이라는 절망에 자리를 내준다.


일각의 도주 끝에 나는 괴한이 그저 밤거리를 걷는 것이 아님을, 정확히는 나를 노린 채 따라붙고 있음을 확신한다.


이유도, 목적도 불분명하나 그럼에도 확실한 게 있다면, 칼 든 남자가 점점 내게 따라붙고 있다는 사실 하나.


두오모 인근 맥도널드에서 밤을 지새운 후 중앙역을 향해 걷기 시작한 지도 어언 45분이고, 중앙역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이탈할 이유, 나를 쫓아온 이유는 이제 와 별로 중요치 않다.


단지, 새벽 4시 30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하나가 - 칼을 들고 -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이 자명할 뿐.


< 우측 밝게 빛나는 호텔에서 도움을 받았다. 감사할 따름이다. >


저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괴한, 짧은 찰나 시선이 머물다 흩어지고, 나는 몸을 틀고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뛰고 또 뛰었다.


밝게 빛나는 전등을 쫓아, 제발 호텔이겠거니 빌며 뛰어, 굳게 잠긴 회전문을 부서질 듯 거세게 두드렸다.

 

영겁 같은 몇 분, 그 시간이 흐른 후에서야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남직원 하나가 나타났고, 이내 깔끔한 복장의 직원 둘이 뒤따랐다.


괴한이 쫓아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들여보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뿐. 걷지 말고, 트램을 탈 것을 권유했으나 완곡한 거절 역시 명백한 거절이었고, 그렇게 황망히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남직원을 바라보며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기다리기를 한참. 땅을 내려보며 호흡을 고르고 있는 내 앞에 문이 열렸고, 아까의 남직원이 말을 건네왔다.


투숙객의 안전을 염려한 것인지, 혹은 그저 새벽의 귀찮은 불청객을 쫓아내려 한 것인지, 손짓을 하며 나를 쫓아내던 남직원은 그럼에도 최소한의 인류애는 남은 것인지, 내게 차량을 픽업하는 장소에서 잠시 기다릴 것을 권유했고, 이내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직접 호텔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걸어 나와, 팔을 대뜸 집고는 나를 끌고 가, 호텔 앞의 조그마한 공원이 텅 비었음을 확인시켰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돌아가려던 찰나, 나무 뒤에서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하나.


그리고 불쑥 고개를 내미는 복면의 남자.




두 번째로 얽힌 시선, 그리고 따라오지 않는 나를 재촉하려다 얽힌 또 하나의 시선.


새벽 4시 45분, 괴한은 호텔 앞 공원 나무 뒤에 숨어 물끄러미 나를 그리고 내 옆에 선 불청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시하듯 튕기며 말을 받던 남직원 역시 그제야 무엇인가가 이상하다는 점을 인지한 듯, 연신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It’s okay.”를 되뇌며 황급히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은 다시 굳게 닫혔으나, 안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 몇 마디가 오갔고, 이내 남직원이 다시 나와 내게 말을 건넸다.


"I am not sure if that guy is dangerous or not. But he is indeed suspicious, so you can stay here in front of the door for 10, 15 minutes. We will look after you and when you feel like you can leave, then you can go."


“나로서는 저 남자가 위험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수상한 것은 사실이니 문 앞에 서 있으면, 10분에서 15분 정도 봐줄 터이니, 없어진 것 같으면 그때 떠나도 된다. "



이후 20분을 기다렸고, 저 멀리 대로변에 캐리어를 끌며 터덜터덜 걷고 있는 여행자 두 명이 눈에 잡혀 감사를 표한 후 주위를 살피곤 걸음을 재촉해 중앙역에 도착했다.




비틀이 굳이 도로 복판에서 기수를 돌렸어야 했는지, 그리고 이후 그 남자는 어디로 그리고 왜 사라졌는지 알 수 없고, 이후의 하루 역시 평범하게 여행지에서의 어느 하루와 다를 것 없이 흘려보내고자 노력했으며, 나 역시 별 일 아니라며, 운이 좋았고 결과도 좋았으니 된 것이라고 다독이며 하루를 보냈지만,


붉게 물든 뿌연 초록 신호등, 밤거리의 적막 속에서 끼이익 들려오는 타이어의 파찰음과 밝은 가로등으로 인해 더욱 대비되는 검은 거리, 그리고 그 속에서 번들거리는 하얀 눈동자 두 쌍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보니 시계는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렇게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 아래 11시 수업을 앞둔 10시 40분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같을 수 없게 되었다.


방어 기제가 작동이라도 한 것인지 정신없이 흘려보낸 어제와 달리, 기숙사에 돌아와 혼자 가만히 어제의 일을 - 잊을 수 없어 - 되짚어 본다.


빛을 받아 번뜩였던 쇠붙이와 굳게 닫혀 있던 호텔의 회전문, 그리고 끝끝내 돈을 아끼겠다며 택시를 부르지 않아 아낀 60유로의 목숨값까지.


내일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음에도, 켜놓은 노트북 스크린 속 스크린이 점멸하기를 반복하고 있음에도, 도무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담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도무지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의미가 있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짙은 허무와 그보다 더 짙은 공포 속에서 끝없이 되물을 뿐이다.


내가 본 것이, 경험한 것이 맞다면, 결국 내 목숨값은 지갑에 든 60유로였고, 어제의 나는 어쩌다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지금의 나는, 그리고 내일의 나는 없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만이 섬짓하게 남아 나를 괴롭힌다.


올해 스쳐간 국가만 어언 30개국, 니카라과, 과테말라 등 위험하다는 국가들도 여럿 거쳤고, 파리의 클럽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크로아티아의 밤에서 맛도 없는 맥주를 진탕 마시기도, 조지아에서 처음 만나는 아저씨가 주는 40도씨 술을 덜컥 받아마시기도 했으나 어제 새벽 스산하게 스미우던 밀라노의 냉기는 그 무엇과도 달라, 잊히지 않는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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