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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Nov 23. 2024

첫 은하수, 첫 별똥별

하늘별

"자넷이라 쓰고 샤넷이라 읽어."


첫 만남은 특별하기 마련이다. 여행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 채현이라 쓰고 림이라 읽어."


"왜?" 


"다 그런 이유가 있어."


"말해봐."


"미국 생활 첫날에 깨달은 서글픈 진실 하나 때문이지."


"도대체 뭐길래?"


"그 누구도 내 이름을 발음하지 못하더라고. 채형, 채횽, 채훈, 채헌, 차헌, 차이형, 차이횽, 리스트는 끝도 없이 이어지지. 그래서 림이야. 한 번 발음해 볼래?


"채애 헌?"


"흐음. 현대 자동차라고 알아?"


"아니 몰라."


비엠더블유가 아닌 비엠븨의 나라에서 왔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현대가 아니라 휘운다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아주 근접했어. 만나서 반가워. 어디서 왔어?"


인사는 마쳤으니 스리슬쩍 서로의 낭만을 견주어 본다.


"어디서 왔어?"


"벨리즈.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따고 중미로 넘어왔지. 넌?"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데. 정말 부럽다. 난 애틀랜타. 첫 주 수업 듣기가 너무 싫어서 중미로 넘어왔지."


"재밌네. 나중에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러 갈래?"


"좋지. 얘기해. 저기 해먹에서 책 읽고 있을 테니."


< 어머니 왈: 맨 오른쪽 사진은 뭐야? 완전 빈민촌 같다. 모기 없니? >


자유롭고 야자수 드리운 라 리베르타드 주의 팔마르시토 해변에서는 시간의 보폭이 넓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 사이 우리는 해변에서 강아지라고 하긴 뭣한 개들과 잠시 뛰놀고, 물속을 헤엄쳤다.


그 사이 우리는 책을 읽었다. 나는 어쭙잖고 허무맹랑한 낭만 이야기, 사랑 이야기를 읽었고, 너는 기억도 나지 않는 독일어로 된 책을 읽었다. 


그 사이 우리는 엘살바도르의 전통 음식인 푸푸사(Pupusas)를 먹으러 나갔는데, 반 시간을 멍하니 기다렸음에도 해는 여전히 지지 않았다. 


그렇게 각자 손에 비닐봉지를 하나 쥔 후 숙소로 돌아와, 가볍게 타월 하나를 챙긴 후 팔마르시토 해변의 잿빛 모래 위에 타월을 깔고 앉았다. 



머뭇거리며 하늘을 물들이던 해는 그제야 바다로 뛰어들었다.



해변가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학업을 진작에 마친 후 남자친구와 여행 중이라던 너는 사르데냐 여행 계획에 대해, 취미로써의 볼더링에 대해, 중앙유럽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해 이야기했고, 졸업은 아직도 요원한 나는 2주 전 시칠리아 여행에 대해, 취미로써의 서핑에 대해, 북미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사이 나는 하나에 1.5달러뿐이 안 하던 푸푸사를 먹어치웠고,

그 사이 너는 네 몫의 푸푸사를 방심에 배 까뒤집은 귀염둥이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러다 말할 소재가 문득 떨어진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하기를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은하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 은하수였다.


한참을 멍하니 올려다보다 입을 뗐다.


"저게 내 인생 첫 은하수야. 정말 아름답네."


"그렇지?"


"가끔 글을 쓰거든."


"그래? 어떤 글?"


"주로 여행."


"응."


"이럴 때면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말이 이해가 가. 내가 품고 있는 그 어떠한 단어로도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 것 같아."


"나도 처음엔 그랬어. 스위스 알프스에 올랐었는데, 손발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추운 밤이었다?"


"그 위에서 바라본 은하수는 어땠어?"


"아름다웠어. 이것보다도 밝게 빛났어. 너도 더 많은 은하수를 보게 될 거야."


"그래야지. 난 별똥별도 아직 못 봤거든. 소원까지 생각해 뒀는데. 어릴 때 울산으로 온 가족이 은하수를 보러 갔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 잔뜩 실망만 하고 돌아왔지. 심지어 여태껏 돌아다니던 여행지들도 죄다 도시랑 가깝거나 내가 잠을 너무 좋아해서 은하수를 본 적이 없어."


"그러면 더 좋겠다."


"맞아. 행복해."


넓은 시간의 보폭은 별을 올려다보던 그 어린 시절로 나를 돌려보냈다. 


매미 울고, 맹꽁이 울고, 쏙독새 울던 시골 여름밤에서의 그 시절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점을 이어가며 의미를 부여했고,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나만의 별자리를 창조해 이름을 하나둘 붙이곤 했다.  


오늘 밤, 나는 꺼질 듯 명멸하는 점 세 개가 커다란 곰의 꼬리일 것이라고 조심스레 짐작했다. 그 오른쪽에 있는 닻별에 이르러서는 어둠 속에 빛나는 왕좌 위의 왕비를 그려내며 카시오페이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세차게 맥동하는 세 원으로부터 오리온의 칼집을 확신할 수 있었다. 틀려도 좋았다. 


그리고 별이 떨어졌다.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예기치 않은 우연의 행복을 알기에, 이 순간의 행복을 자주 찾을 수 있는 삶을 살게 해 달라는, 어린 시절 별을 올려보며 품었던 소원을 빌었다. 


유치하고 멋없어, 아버지 차에 실려 밀양에서 불고기를 먹고 집에 돌아오던 길, 경부고속도로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머금었던 소원을. 스키 타러 가던 밤 산이 너무도 쉬이 사라져 올려다본 동해고속도로의 하늘에 띄우지 못했던 소원을.


"봤어?"


"뭘?"


"별똥별 말이야 별똥별. 저기 카시오페이아 밑으로 떨어지는."


"아니. 진짜? 너 본 거야?"


"응. 첫 은하수랑 첫 별똥별을 하루에 보다니 꿈만 같아. 비현실적이야. 말도 안 돼."


"소원은 빌었고?"


"물론이지.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그렇게 붉은 달이 떠오르기 전까지 우리는 별 아래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해변가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늘도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었지만, 넓은 보폭 사이의 찰나 속에서 나는 은하수를 보고, 또 별똥별을 보았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소원을 빌었다. 더 바랄 게 없는 엘살바도르에서의 첫날밤, 환하게 웃는 별이 다가와 어린 시절의 나와 이제는 조금은 커버린 나를 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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