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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Nov 09. 2024

정신이 없을 땐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땅. 중미.

하늘은 하늘이지.


가끔씩 교정을 거닐 때 하늘을 올려다본다. 돌아다닌 곳이 많아 까먹기도 까먹었고 뒤섞기도 뒤섞었지만, 제멋대로 기억을 조합해 '어디의 하늘은 어땠지.' 하며 내가 바라본 수많은 하늘들을 떠올린다.



해 질 무렵 트라파니의 하늘은 타로코 오렌지만치 붉었고, 오메테테의 하늘은 황순원 작 소나기의 자색 꽃다발마냥 흐드러져 나는 눈물을 흘렸더랬다. 마데이라의 하늘은 별하늘이었고, 자그레브의 하늘은 잔잔히 비를 흩뿌렸다. 그리고 내가 사는 애틀랜타의 하늘은 별 찾아 올려보아도 껌뻑대는 비행기에 한숨만 푹 나오는 정내미 떨어지는 하늘이었다.


그래도 결국 하늘은 다 같은 하늘이었다. 가족 남겨둔 부산의 하늘도, 손흥민에 대해 묻던 튀니지 대통령궁 경찰의 하늘도, 웃으며 해산물 수프를 건네던 갈라파고스 민박집 아주머니의 하늘도, 여기서 보나 저기서 보나 하늘은 하늘인 것이었다.



오늘 아침, 나는 궤도역학 수업을 들으며, 지구 반지름이 6378킬로미터인데 태양까지의 거리는 1억 5천만 킬로미터이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달려도 해왕성까지는 4시간이 걸린다는 내용을 주워 들었다. 교수의 따가운 눈총을 무시하고 닫힌 천장을 한참이고 올려다보며, 밖에 나가 올려다볼 하늘이 다 똑같은 광활한 우주의 티끌이라는 생각을 한참이고 했다. 그리 생각하다 하늘에 대한 단상을 공책에 몇 줄 끼적였다.


마지막으로 끼적인 내 결론은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지만 사람은 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람 사는 게 별 거 없지, 다 똑같지 하지만, 그리하면 하늘도 같을 게 없어 다르지 않냐 이르지만, 앞을 똑바로 직시하고 보면 눈에 들어오는 건 사람이란 우주고 신비라 다르다고 적었다. 올려다본 광활한 우주의 티끌과는 또 다른 소우주라 생각했다.



유럽에서 열차를 타면 나는 창밖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가끔 기차가 알프스를 지나칠 때면, 카메라를 꺼내 들곤 우뚝 솟은 설봉을 담기도 했지만, 광활한 프랑스의 평원을 지나거나 혹은 야간열차가 어둠에 잠겨 국경을 넘을 때면 밖을 보기보다는 책을 읽거나 잠깐 눈을 붙였다. 자연은 변화무쌍하고, 때로는 비가, 때로는 눈이 내리다가도 무지개가 뜨고 하늘이 개지만, 그럼에도 그 변화는 느긋해 쉬이 질렸다.



엘살바도르는 당분간 마지막으로 찾게 될 중미의 국가였다. 짧게 경유한 파나마, 여행을 약속한 일행의 코로나 감염으로 수도의 구석에서 시간을 때웠던 코스타리카. 아비는 그물을 손질하고 아들은 노를 저어 뭍으로 다가오던 어부 삼부자의 모습에 울컥했던 오메테페의 니카라과, 고등학교 동창과 떠나 10시간 무터널 버스 안에서 고생만 실컷 했던 과테말라까지. 살인율이 높아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온두라스와 비행 편이 비싸 당분간 못 갈 벨리즈까지 생각하면 마지막인 것이었다.



여하튼 산살바도르행 비행기 좌석에서도 나는 저 땅 너머의 저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은 하늘이라는 류의 생각에 잠겼다. 무엇이 어디를 정의함에 있어 하늘도 땅도 대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걸을 때 삼라만상을 마주했던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엘 팔마르시토(El Palmarcito) 해변으로 가는 우버 안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낯설고 위험한 이 땅에서 나는 주로 하늘과 땅만을 보며 다녔다는 것을. 모든 것이 생경한 중미라 불리는 이곳에서 나의 경계심은 바짝 곤두서 있었다. 정부군을 피해 다니는 게릴라마냥 사람을 피해 하늘과 땅만 보고 걷는 일이 잦았다.


골목골목마다 늘어선 라 티엔다와 좌판 앞에서 파리 쫓듯 손을 늘어뜨린 아주머니, 학교가 사치인 듯 뚱한 얼굴로 가게를 대신 지키는 배 나온 둘째 아들과 흙장난 치는 어린 셋째와 넷째, 사람이 모여 정류장이 되었는지 본디 정류장이었는지 결코 알 수 없는 어수선한 길 중간에 모이고 또 흩어지는 군중들,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모래먼지 이는 흙길을 따라 체육복을 입고 집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배는 불룩한데 다리는 가늘면서도 맥주 캔 쥔 모습은 본 적 없는 아저씨들, 맨발로 사다리를 오르고 양 어깨에 페인트 통을 짊어져 건물을 올리는 인부들, 삐딱한 모자를 쓰고 공을 가랑이 사이로 굴린 후 뛰어가는 남자아이들. 나는 차에 앉아 그 모든 장면을 스쳐 지나가듯 보곤 했다.


정신이 없을 때면 차라리 하늘을 보거나 땅을 보는데, 차 안의 천장은 오늘 아침 교실의 천장처럼 닫혀있고, 그 바닥마저 똑같이 카펫이었다.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나는 중미가 여전히 정신없고 부산스럽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늘은 하늘이고, 이리 보면 땅은 또 땅인데, 그 사이 낑긴 삶의 모습은 유난스러웠다.



엘살바도르는 정신없고 부산스러웠다.


고향 부산 부평동 시장의 왁자지껄함과는 다른, 삶이 여러 지류로 갈라져 나갈 때의 북적거림이었다. 엘 팔마르시토 해변으로 가는 길 위, 나는 조금 연 창 틈으로 미국산 스쿨버스가 일으킨 모래바람을 들이켰다. 바람에 실린 건 건조한 흙내였는데, 그건 주인을 닮아 마찬가지로 부산스러운 중미의 흙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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