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도피.
언젠가 스페인에 가 투우를 한번 봐야겠다. 거기서라면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타도르로 받히든, 투우로 박히든
이른 새벽, 창틀 사이로 새어오는 바람에 눈을 떴다. 손을 더듬어 폰을 찾아쥐곤 뒤집어 눈 가까이 댔다. 8월 12일, 새벽 4시 28분. 오늘도 알람이 울리기 직전 가까스로 일어난 모양이었다. 알람을 끄고 잠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축축하고 비릿했다.
'아마도 이건 육풍 때문이리라.' 몇 분을 더 누워 있다, 미적거리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층 침대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어젯밤 굳게 채워둔 자물쇠를 하나 둘 풀었다. 배낭을 꺼내 앞뒤로 둘러멘 뒤, 문을 나섰다. 넷이서 둘씩 짊어졌던 배낭의 무게, 둘이서 둘씩 짊어졌던 배낭의 무게에 비해 혼자서 들쳐멘 배낭의 무게는 어쩐지 더 묵직했다.
"넌 뭐든지 재려 하더라. 세상만사가 그렇게 네 계산대로 딱딱 떨어지진 않아." 언제 누구에게 들었는지조차 흐릿한, 기억 어딘가로 가라앉아 있던 말 하나가 잠시 떠올랐다 다시 가라앉았다.
어깨와 허리는 저항하듯 비명을 질렀고, 나는 "흡." 숨을 들이마신 뒤 허리끈을 조였다. 졸음과 고통과 허기를 애써 무시한 채 길을 나섰다.
밤은 여전히 어스름 속에 잠겨 있었고, 여명은 아득히 멀기만 했다. 푸르면서도 검은 잿빛 하늘. 덜 섞인 물감 여럿 될 대로 되라고 칠하기라도 한 듯한 하늘이었다. 그 하늘 아래의 탈린을 나는 걸었다. 물웅덩이를 지나치는 승용차 타이어의 파열음, 직후 우수수 쏟아지는 물방울, 가로등을 찢을 기세로 날카롭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간간이 거리의 적막을 깨뜨렸다.
나는 밤바람이 육지에서 바다로 흐르니, 이 바람을 따라가면 필연적으로 항구에 다다르리라 추정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떠나온 곳에서 도망쳐, 도망칠 곳으로 떠날 시간이었다.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문득 헤밍웨이를 떠올렸다.
삶이 이렇게 빠르게 달아나고 있는데, 정말 철저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어.
그 누구도 인생을 철저히 살지는 않아. 투우사를 제외하고는.
진정, 삶이 이리도 빠르게 달아나고 있는 것일까. 혹은 그저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것일까.
붉은 깃발을 향해 달려간다. 끝없는 방랑 후에 드러날 어떠한 진실을 맹신한 채 - 가령, 그런 것 따위는 없다거나 하는. 끝없이 도주한다.
칠흑의 방에서 해방된 들소는 태양을 향해 달려든다. 차례로 목과 등에 창을 꼽고, 이내 숨을 거둔다.
그렇게 걸어 탈린 항의 페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에케로 선사의 배는 해가 뜨기 전, 새벽 6시에 탈린 항을 떠나 오전 8시경 헬싱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저기 서 있는 저 사람들 모두에게는 헬싱키로 가야만 할 나름의 이유가 있을까.
마타도르, 반데리예로, 피카도르, 페네오, 투우, 그리고 관중*. 대부분의 삶은 관중에 수렴하겠다. 그럼에도 분노에 찬 투우보다는, 그대들의 광대 마타도르보다는, 오래 웃으며 흘러가겠다.
뱃고동이 울렸다. 배는 탈린을 뒤로하고, 헬싱키로 떠났다.
거대한 선박답게 부대시설 또한 여럿이었지만, 정작 나는 공연장 끄트머리의 창가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또 졸며 두 시간을 보냈다.
당신네들은 모두 길을 잃은 세대요.
"길을 잃지 않은 세대는 그럼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태양은 오늘도 기어코 떠올랐다.
나는 말을 잃었다. 일렁이는 파도에 상념만 넘실거렸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고 저리 돌아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그러면 정녕 나 역시 그 땅으로 흘러 돌아갈 뿐인 것이오."
헤밍웨이는 말이 없었다.
내리기 전 나는 갑판에 올랐다. 커져만 가는 헬싱키 항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담배를 피우던 노인 하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 보통 어떤 사람들이 이 배를 탑니까?"
"내가 알기론 이 배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네."
"그뿐입니까?"
"그래. 바다 건너 핀란드에서는 모든 것이 탈린보다 비싸니 말일세."
"저 같은 사람들은요?"
"다 그런 것 아니겠나."
그의 모두에는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다시 한번, 마지막 뱃고동이 울렸다. 담배 연기, 흐린 하늘, 그리고 배에서 흘러나온 증기가 모두 흘러 흩어졌다.
바람이다. 트라파니부터 불어오던 바람. 헬싱키에서도 바람은 계속 불어 왔다. 이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고, 이 바다는 어디까지 흘러나갈까.
어쨌든 난 남아메리카에 가고 싶어.
이봐. 다른 나라에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나도 벌써 그런 짓은 모조리 해봤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닌다고 해서 너 자신한테서 달아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래 봤자 별 거 없어.
하지만 넌 남미에 가 본 적도 없잖아.
남아메리카라니 뭐 말라죽은 거야! 지금 같은 심정으로 그곳에 가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곳은 괜찮은 도시야. 어째서 파리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
도착하고 보니 여긴 남미도, 파리도 아닌 헬싱키다.
남은 도피의 나날이 적어,나는 상념에 잠길 틈도 없이, 트램에 몸을 묻고, 군중 속으로 스며든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엔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지만, 도망쳐온 곳이 낙원일 수도 없다는 모순. 그 굴레를 오늘도 걷는다.
언젠가 스페인에 가 투우를 한번 봐야겠다. 거기서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타도르로 받히든, 투우로 박히든.
나는 프랑스를 떠나는 게 너무 싫었어. 프랑스에서 삶은 너무도 간단했어.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게 바보 같다고 느꼈지. 스페인에선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었거든.
*헤밍웨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인용한 부분은 모두 앞에 ㅣ 표시로 처리했습니다. 한 번 새로운 시도를 해봤고 가독성이 조금 떨어집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 (투우를 좋아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름 재주를 부려봤는데 재밌게 읽으셨기를 바라봅니다.
*마타도르(Matador): 소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투우사, 카포테(밝은 천)로 소를 흥분시킨다. 이후 피카도르(Picador)가 소를 찌르고, 반데리예로(Banderillero)가 작살을 꽂아 넣은 후 다시 마타도르가 마무리한다. 이 과정에서 마타도르가 사망하는 일도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