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밤, 별, 은하수

by 노마드

"아무런 계획 없이 마지막으로 하루를 보낸 게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던 나날들이 수년간 이어졌다.


인간이 하루에 3시간씩 자도 2주 정도는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15분간 급식실 벽에 붙어 자기를 반복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사무실에 올라가기 전 오늘 처리 해야 할 기사의 수가 두 자리 수인지 궁리했던 군 시절을 지나, 돈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여덟 달 후의 항공편을 예매하던 애틀란타와 유럽에서의 1년을 너머 엘살바도르에 다다랐다.


진절머리 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내일 해야겠다'는 다짐을 '오늘 한다'라는 행위로 바꿔갔던 하루들이 켜켜이 쌓여 달이 되고 년으로 거듭났다.


엘살바도르는 그래서 좋았다. 그곳에선 모두가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 나는 온전히 나일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1년, 과테말라에서 반년을 살고 엘살바도르로 넘어온 옆 방의 존은 매일 빤 티셔츠 목처럼 늘어져,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하루들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아래 침대의 샤넷은 '언제'가 내포된 질문을 받을 때면, "내일, 아니 모레, 아니면 아예 그 다음 날?"라고 답하거나, "몰라 나도." "사실 돌아가는 비행 편을 바꿀까 생각 중이야."라고 웃으며 답했다. 물론, 저녁을 먹자고 한 후 샤워까지 마치고 30분 후에서야 나타난 건 괘씸했지만...



정확히 1년이 지나 회고하며 글로 여행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나의 일상은 쳇바퀴 돌 듯 열심히 굴러가고 있다. 기억은 덩달아 조금씩 옅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언제 한 번 다시 엘살바도르의 시골 마을을 찾겠다고 다짐한다. 사막의 아지랑이를 붙들고 바싹 메마른 입술로 '물' 한 자만 겨우 그리는 방랑자처럼...


엘살바도르에 오기 전 54일 간의 유럽 여행은 굳이 요약하자면 전투적이었다. 유럽이 처음인 친구들에게 다음에 다시 올 정도의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일념 아래 가이드를 자처했고, 이후 혼자 돈 북유럽은 고독의 연속이었다. 계획과 실행의 반복에 이은 지리한 상념과 향수의 반복이었다. 즐거웠지만 온전히 즐길 수는 없었다.



엘살바도르는 달랐다.


"물에 들어간다."라는 다짐도 있었고, "물에 들어갔다."라는 결과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언제"가 결여되어 있어 도리어 내가 나로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었다.


무료하지만 권태롭지는 않은 나날들을 보냈다.



일어나면 수영복을 입고, 물병과 수건을 주섬주섬 챙겨 해변으로 나간다.



바다에 몸을 담갔다 풀장에 게들이 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언덕 위의 잔디에 누워 퍼즐을 풀거나, 모래사장에 엎어진다.



윤슬이 팔마르시토 해변의 검은 모래를 수놓을 때쯤, 다시 호스텔에 들어가 점심을 챙겨 먹고 또 물가로 나온다.



그렇게 물에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하는 하루는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무너져 있다. 지금 와서는 언제가 언제인지, 그때가 무슨 요일인지 짚어낼 수조차 없을 만큼.


그런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이윽고 저녁이 찾아오고,



저녁을 먹고 바닷가로 나가면 하늘에 별이 떠 있다.



운수 좋은 날, 오늘 하늘을 수놓은 건 별뿐만이 아니다. 은하수가 마음에 박힌다.


< 샤넷이 신발이 아프다 해서 바꿔 신은 신발 >


발이 아파 못 걷겠다는 샤넷에게 "그래도 내가 너를 업을 수는 없잖아." 농담하며 신발을 바꿔 신은 게 저기 아직도 명멸하는 은하수를 제외한다면 오늘 하루의 가장 큰 일이었다.



숙소 돌아오는 길에는 아직까지 사냥 당하지 않은 게 용햔 손바닥만한 게가 돌길을 도망다니고,



숙소로 도착하니, 고양이 두 마리가 멀뚱멀뚱 나를 반긴다.



헤르만 헤세 말하길,


화요일에 할 일을 목요일로 미루는 일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사람이 나는 불쌍하다. 그렇게 하면 수요일이 얼마나 즐거운 지 그는 알지 못한다.

수년 간 화요일에 할 일을 월요일에 당겨 처리하는 일상을 살아왔다.


이곳, 엘살바도르의 낯선 시골 마을에서 나는 온전히 하루를 낭비한다.


쏟아지는 은하수 아래, 별을 맞으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