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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아 그 산을 오르지 마오

콘셉시온 화산

by 노마드

2023. 03. 25: Day 8,


산을 오르기 전, 나는 분명 두 발로 걷고 있었다.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앞발로 돌을 움켜쥐었던 것도 같고, 내려갈 때는 팔을 요란히도 흔들어대며 나무줄기 따위를 잡았던 것도 같다. 그 모습은 흡사 원숭이와 같았을 것이다. 바나나 서리를 꿈꾸며 니카라과 콘셉시온 산 아래의 플랜테이션을 가로지르는 나. 허기에, 본능에 몸을 내맡긴 채 산을 뛰어 내려가는 나.


산에 오르기 전, 나는 분명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살아가는 인간이었는데, 내려가는 길 마주친 고함 원숭이는 앞팔로 나무를 움켜쥐었다. 콘셉시온 산에서의 나 역시 그와 같이 사족 보행하는 동물이었다.


< 우끼끼? >


니카라과의 오메테페 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확실히 많지 않았다. 전날 강변에서 내다본 자홍빛 노을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길 마주친 사냥개 두 마리는 침을 질질 흘리며 나를 쫓아왔고, 별구경을 하러 나가 간밤의 추격극을 재현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운전면허가 없어 버기를 빌릴 수도 없었고, 자전거를 빌리려 하니 사장이 깐깐하다는 후기가 많아 마음을 접었다. 산 라몬 폭포(Cascada de San Ramon)는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에 있었고, 눈물의 샘(Ojo de Agua)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나는 5월에 예정된 과테말라 아카테낭고(Acatenango) 등산을 대비하는 심정으로 콘셉시온 화산 등반을 예약했다.


돌이켜 보면, 정상 사진이라곤 없는 등반 후기에서 나는 앞으로 다가올 산행이 어떠할지를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 어리석게도 - 생면부지의 니카라과까지 떠나왔으니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등산객들은 오전 7시쯤 투어 회사 앞에 집합했다. 중남미로 신혼여행을 왔다는 독어 부부 한 쌍, 말이 거의 없던 다른 부부 한 쌍, 알래스카에서 기장 연수를 받고 있다던 내 또래의 여자 하나에 가이드가 붙어 총 일고여덟의 사람이 산을 오를 예정이었다.


반 시간쯤 달리니 아스팔트 길이 잿빛 모래로 바뀌었고, 이내 방문을 환영한다는 팻말이 나왔다. 대충 자른 나무와 꼬아 친 쇠줄로 만든 울타리 여럿이 지나갔고, 여기가 어딘지 아무런 감도 잡히지 않을 때 즈음 차는 정차했는데, 여느 등산이 그렇듯 처음에는 말도 많고, 활기도 넘쳤다.


알래스카에서 기장 연수를 받는다는 엘라는 이누이트와 3주간 생활하며 겪었던 일들을 재미있게 풀어놓았고, 독어를 구사하는 부부는 파타고니아, 네팔 등반 경험을 들려줬는데, 흥미롭긴 마찬가지였다. 이후 각국의 워라밸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는 산 초입에 자라난 거목 앞에 다다랐다.


가이드는 일정에 대해 브리핑했고, 여느 가이드가 그러하듯, 나무에 얽힌 설화가 있다느니, 니카라과 경제가 어떻고, 산의 바나나 플랜테이션은 사유지이므로 바나나를 따먹으면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가이드가 나무 스틱을 무조건 들고 갈 것을 강권할 때부터 징조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으레 그렇듯, 다른 문화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나무 스틱의 함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앞의 과묵한 부부 둘을 제외한 모두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우리 모두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처음엔 제법 잘 닦여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비가 내린 다음 날이면 흑갈색 진흙이 진창으로 변해 땅이 발을 쩍쩍 집어삼킨다는데, 땅의 문제는 아니었다. 만유인력의 끌어당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력해져만 갔는데, 이는 땅이 아니라 전적으로 체력 탓이었을 것이다.


등산로라 부를 만한 길이 있었고, 나는 처음에 체력을 과신해 산을 거의 뛰어오르다시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점점 차올랐고, 어느새 행렬의 후미로 쳐졌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모든 신체 활동이 '등반'보다는 '등산'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물을 빨리 마시면 짐이 줄어든다는, 별 대단치도 않은 진리를 깨우친 스스로에게 잠시 취해 있었는데, 고된 산행에 먼저 맛이 간 건 머리였겠거니 지금은 생각한다. 물론 속으로 취할 뿐 말은 없었다. 단순히 말할 기운이 없었기 때문에.


< 딱 여기까지 오를 만했다. >


조금 더 오르자 바람이 산 아래로 강하게 휘몰아치는 고원이 나왔다. 섬과 저 너머의 육지가 눈에 들어왔다. 길에서 한 걸음 벗어나면 밀림 한복판에 갇히도록 빽뺵히도 자라나 있던 나무들을 지나 고원에 오르니, 거대한 호수를 배경 삼아 바람결 따라 누운 건초다발 같은 무릎께의 잡초 더미들이 듬성듬성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밀림과 고원의 경계에 위치한 바위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배급받은 사과, 초코바, 피크닉 주스를 나눠먹기를 잠시, 허락된 평화는 짧았고, 이내 지옥의 등반이 시작되었다.


고원 위의 안개는 자욱이 깔려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이드는 "이제 2시간이면 정상에 도착한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오르고 보니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단지 그 2시간이 어떤 2시간이 될지에 대한 설명이 매우 부족했을 뿐이었다.


< 뒤로 고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독어 부부는 저만치 멀어져 갔다. 알래스카 기장(편의를 위해 호칭을 줄인다)과 나는 뒤쳐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중간 어디 즈음에서 다리를 질질 끌며 겨우 산을 오르고 있었다.


밀림 속 진흙길은 양반이었다. 이제 나의 앞을 가로막은 건 불과 몇 미터 앞까지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와, 습식 사우나에서 갑자기 얼음물에 뛰어든 것만 같은 칼바람, 그리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돌덩이로 포장된 등반로라 지칭되는 무엇이었다. 그런 걸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문득 어린 시절의 마리오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가족은 이모네 집을 자주 찾았다. 베개와 이불로 만든 아지트, 줄넘기를 허리에 매고 칙칙폭폭 기차놀이를 했던 추억도 있지만, 가장 설렜던 건 사촌 동생 집에 있던 닌텐도였다.


한 스테이지를 깰 때마다 마리오는 꼭 삼각벽돌을 올라 깃발 봉을 타고 내려왔는데, 나는 늘 주요 부위를 봉에 마찰하며 내려오면 얼마나 아플까 하는 쓰잘데 없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물론 실제로 그 장면을 보는 일은 형편없는 게임실력으로 인해 적었다. 사촌 동생이 무한 생명 버그판을 설치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게임은 내가 마리오를 구덩이에 빠뜨려 끝나곤 했다. 화면이 검게 변할 때마다 나는 쏟아지는 눈총을 견디며, 다시 코인 화면이 나오고 마리오가 부활하기까지 그의 행방을 고민했다.


콘셉시온 산을 오르며 드는 생각도 비슷했다. 몸이 바람에 휘청여 쓰러질 것만 같으면, 나는 마리오가 봉을 타고 내려오며 느꼈을 고통을 떠올리고 균형을 바로 세웠다. 발이 미끄러져 몇 걸음 밀려 내려간 후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리오의 구덩이를 떠올렸다.


정상이 가까워졌는지 안개는 점점 짙어졌고, 아래는 까마득히 사라져 버렸다. 조금 더 밀려 내려갔더라면 어디까지 떨어졌을지, 어쩌면 내가 직접 검은 화면을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가시거리 20m >
< 이후엔 위험해서 몰려서 올라갔다. >


비바람은 세차게도 불어왔다.


< 좌측 사진이 정면에서 찍은 사진. 45도의 경사에 안개가 자욱했다.


한 걸음씩 내딛으며 고도를 높일수록 식생도 그에 발맞춰 바뀌어갔다. 습기와 강한 바람 탓에 짜리몽땅하고 잎이 넓은 식물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야생화(할미꽃이 여럿이었는데, 핑계였다)를 구경하겠다는 핑계를 돌려가며 댈 정도로, 등반은 힘들었고, 손을 쓰는 일은 늘어만 가는데, 쉬는 주기는 짧아져만 갔다.


수없이 미끄러졌다. 한 번은 실수로 이끼에 발을 디뎌 몇 미터를 밀려 내려갔다. 간신히 넙데데한 식물줄기를 붙잡고 멈췄다.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정상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분화구가 근처여서인지 시리던 바람은 견딜만할 정도로 차가워졌고, 식생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대신 미끄러운 이끼 낀 바위와 발이 푹 꺼지는 화산 모래가 그 자리를 메웠다.


여전히 경사는 45도를 넘나들었다. 비바람은 세기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몰아쳤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었다. 원정대의 후미에 선 나는 병사가 전쟁에 임하듯,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한 걸음씩 내디뎠다.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화산재에 발을 묻고 일진일퇴의 더딘 행군을 계속하거나, 총탄 피해 달리는 병사처럼 이끼 바위 위에서 곡예를 벌이거나. 나는 인간성을 포기했다. 네 발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더는 옆도, 아래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의 장막 속에 앞사람의 발과 간혹 쓸려 내려오는 화산재만이 흐릿한 눈앞에 드리울 뿐이었다. 잘못 딛는 한 걸음이 낭떠러지로 이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며, 나는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운 채 산을 기어올랐다.


마침내 정상이었다.



그러나, 등정에 성공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안개는 여전히 그 마수를 정상까지 드리워, 나는 분화구의 위치조차, 방향조차 짚어낼 도리가 없었다. 그 위치를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가이드의 외침 덕분이었는데, 그는 내 옆에 서 있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세 발자국 옆이 분화구야. 굴러 떨어질 거 아니면 이리로 와."라고 소리쳤다.


그의 표정은 농담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고, 여자는 화들짝 놀라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나 역시 걸터앉던 바위에서 조금 더 내려와 아까 반만 먹고 아껴둔 샌드위치를 꺼냈다.


< 휴지는 벌써 젖었다. >


비바람은 여전히 세차게 불어왔다.


샌드위치의 상추는 갓 밭에서 딴 것처럼 싱싱했는데, 빗물이 스며들어 푸르러져서였다. 물이 따로 필요가 없었다. 눅눅한 빵에 밴 비맛으로 충분했다. 샌드위치를 몇 번 씹다가 조금 뱉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전의 휴지를 겨우 걸러냈다. 비릿한 빗물의 맛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후기에 정상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이유가 있구나."라고.


산을 내려오는 과정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수년 전, 중학교 동창과 눈 덮인 한라산을 내려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 거의 반 누워 내려왔던 그날과 비슷했다는 정도만 말해두련다. 네 발을 이용해 천천히,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내려왔다. 중간에 근육 경련이 올 뻔한 순간도 몇 번 넘겼다.


< 독어 부부가 저 앞의 점 >


하늘은 얄궂게 다 내려갈 때가 되어서야 비웃기라도 하듯 웃음을 내보였다.



집 나가면 개고생.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더니 내 꼬락서니가 딱 그 꼴이었다. 돈 주고 고생하는. 비 홀딱 맞아 젖은 개.


< 다시 봐도 말도 안 되는 경사 >


다시 고원에 다다른 이후에는 비교적 가볍게 산을 내려왔다.



꽃구경도 하고, 나무 사이로 원숭이도 몇 마리 포착했다.



그 나무 타는 모습이 산 오르던 나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아 괜히 쓴웃음이 났다.



가이드는 고함 원숭이의 소리를 흉내 내 어떠한 말을 주고받는 것 같았는데, 의도와는 다르게 "꺼져"라고 말을 한 것인지 원숭이는 뭐라 길길이 날뛰더니 다른 나무로 넘어갔다.


< 말 몰이꾼. 신기했다. >


그렇게 고된 몸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산행을 마치고 셔틀에 '실려'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너무 피곤하니 뿌듯함도 뒷전이었다.



피자 한 판을 해치우며, 나는 자문했다.


"이 개고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하며...


아마도 피자를 더욱 맛있게 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정말 그뿐이었다.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길, 오메테페 섬에는 오늘도 노을이 졌다.



자기 합리화하기 딱 좋은 노을이었다. 오늘 하루의 고생을 통해 배운 건 이것뿐이었다: 돈을 헛되이 쓰지 말자. 젊음의 고생을 굳이 미화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르지 말아야 할 산을 오르는 건 때로는 매우 불필요한 일이라는 교훈 말이다.


대단치도 않은 교훈들이었다.


호수에 드리우는 자홍색 노을 아래 그물을 손질하며 뭍으로 배를 몰던 어부 삼부자를 보며 눈물 흘리던 게, 하늘을 수놓은 별의 향연에 감탄하며 친구와 전화했던 게 어제의 일이었는데, 고된 산행의 끝 오늘 내가 마주한 건 나의 간사한 마음뿐이었다.



다음 날의 페리 시간을 확인하고, 수중에 남은 얼마 되지 않은 돈을 세며 잠자리에 들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루였다. 너무도 고단해 더는 생각할 힘조차 없던, 그리고 실질적으로 니카라과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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