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감성 세포가 과하게 폼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최대한 눌러가며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 '저자의 말' 부분에서 울컥 올라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눈시울이 벌게지고 있는 와중에 희한하게도 입꼬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수학의 필요'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책을 읽다 이렇게 울다 웃을 일인가.
알 수 없는 이 기분. 도저히 안 되겠다. 저자에게 바로 전화를 걸기로 한다.
인사고 뭐고 없다. 막 바로 본론. 다짜고짜 묻는다.
"아니, 여태 안 쓰고 어떻게 산 거야?"
그녀는 저자 답지 않게 웃는다.
"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소년 마냥 웃는 저자는 나의 친구 S다. 여고 때부터 도시락 줄줄이 비엔나를 반으로 나눠 먹던 의리 넘치는 사이, 30여 년 역사를 함께 해 오고 있는 사이다.
최근 20년 넘게 수학을 가르쳐 온 그녀가 전자책을 출간한 것이다. 석달 전 쯤 S는 동네 분식집에서 참치 김밥을 먹으며 수줍게 고백했었다.
"나 전자책 내는 수업 한번 들어볼라고"
그러더니 이번에는 수줍다 못해 거의 웅얼거리 듯 말했다.
"나.. 책 나왔어"
사실 고등학교 때 수업 중 쪽지를 주고 받긴 했지만 S의 제대로 된 글을 본 건 처음이었다. 첫 장을 열기 전 난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가깝다고 느끼는 누군가의 글을 연다는 게 긴장을 동반하는 일인 걸 처음 알았다. 글 속에서 내가 모르는 낯설지만 멋진 S의 생각을 만나게 될 때면 기분 좋은 거리감도 느꼈다.
열일곱, 교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S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 마흔넷,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S는 책상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그렇게 S를 책으로 만나고 나니 만감이 교차하면서 눈물과 웃음이 짬뽕된 것이다. 뭔가 대견하면서도 존경스러운 묘한 감정이랄까.
그러고 보면, 원래 S는 묘한 친구였다.
말 주변이 없는 나를 끊임없이 떠들게 만드는 친구였으니까. 입보다는 귀 여는 게 훨씬 편한 내가 S랑 있으면 왜 입이 바짝 마를 때까지 떠들어대는 걸까. 광대가 아플 때까지 웃어 제끼는 걸까. 늘 신기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김창옥 님의 강연영상을 접하고 무릎을 치게 됐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깎아내리긴 쉬워도 추켜 세우긴 쉽지 않은 특성이 있단다. 때문에 나 대신 나를 추켜 세워 줄 사람, '놀라 줄 사람'을 늘 찾게 되고 그 '놀라주는 사람'과는 중장기적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인정'의 다른 말이 바로 '감탄'이기 때문에
그때 알았다. S에겐 다정한 '우와'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보통 아이돌 그룹 내에도 '비주얼 담당' '퍼포먼스 담당' '큐티 담당'이 있듯이 우리 사이에 있어 그녀는 진심의 '우와'담당이었던 것이다. S의 '우와'는 보통 '이런 천재가 다 있나' 라는 말과 세트로 다닐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카카오 택시'가 등장했을 무렵 내가 엄지손가락으로 한 큐에 택시부르는 걸 봤을 때,
'무인양품'과 'MUJI'가 같은 브랜드인 걸 알고 있을 때,
"우와 이런 천재가 다 있네" 하면서
"너 꼭 나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 돼. 어리바리한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돼"
당부까지 덧붙이는 것이다.
어떨 땐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도 가끔 착각이 들 정도다.
'나 원래 똑똑한 사람이었던 거 아냐?'
이렇게 시시콜콜한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주니 원래 딴 그룹 안에선 추임새 담당인 나도
이 친구 앞에선 신나서 떠들 수 밖에.
얼마 전 수술 경과가 좋지 않아 병원을 찾기 위해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S는 지나는 길에 들렀다며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쥐어주고 사라졌다.
심란한 마음에 아침도 못 먹고 버스에 올라 탄 나는 그걸 열어 보곤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었다. 그러다 바로 피식 웃고야 말았다. 내가 좋아하는 주전부리 이것저것을 모아 놓은 그 속에 막대 사탕이 세 개나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말고 쪽쪽 빨면서 가라고. 잘 될 거야'
카톡 메시지와 함께.
이런 S이다 보니 사실 '우와'를 더 많이 하게 되는 건 나일지 모른다. 속으로 할 때가 많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그녀 말대로 사탕을 쪽쪽 빨면서 생각했다. 조만간 출간 기념으로 고기에 후식 냉면까지 먹어야겠다고.
맛있는 거 먹고 신나는 헛소리 주고받으면서 낄낄 대다 보면 마음의 요철 같은 것들도 잠시 잊게 될 테니까. '아무것'이었던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