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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브 Dec 22. 2022

청계천 Consume

서울 일탈

타인과 보낸 시간은 공유된 순간이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기억의 왜곡성 또한 따라서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또 비가 내린다. 익선동 때에는 천둥 번개가 강했다면 오늘은 비가 세차게 내리는 쪽이다. 청계천 위쪽 어느 외진 골목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 와인 바에서 비노 베르데 한 병을 둘이서 비우고 있다.




오늘은 먼저 도착했다. 3/3 모두 실패는 아닌 것이다. 먼저 도착했기에 주문할 특권이 주어졌다. 겨울이 코앞인데 비노 베르데가 있는지를 찾아봤다. 서울에서야 계절 상관없이 다들 아무거나 마시는지는 몰라도 파리에서는 술에 관해 자기주장 철저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맥주는 여름에만 마신다는 사람도 있고 화이트 맥주는 절대 안 마시는 사람, 계절 상관없이 로제 와인 절대 안 마시는 사람, 식전주로 무조건 파스티스를 선호하는 사람, 프랑스 외 다른 나라 와인은 취급도 안 하는 사람, 보르도 와인만 마시는 사람, 숙취가 심해져서 술 다 끊고 샴페인만 마시는 사람 등등. 나도 예외는 아니라 맥주는 기네스만 용납이 되고 맥주만 파는 곳 회식은 가지 않는다. 서울에서 뜬금없이 포트와인 바에 앉아 있으니 파리에서는 식전이나 식후에 한 잔 마시는 정도로 여겨왔던 포트와인과 여름에만 마시는 비노 베르데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내 개인적 취향에 따라 소프트보다는 스파클링이 더 용서될 것 같아 내 멋대로 비노 베르데 한 병 주문을 넣었다.


창문 옆에 앉았지만 창문 밖에는 또 다른 돌벽만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바 안에는 첫 손님인 나 밖에 없었다. 분위기와 조명이 심하게 아늑해서 디테일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게 인테리어의 핵심 같은데 비가 오고 있어서인지 사람이 없어서인지 으스스한 느낌만 들었다. 10분도 안되게 기다리는 동안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오늘 만남의 시작과 끝을 초조하게 수차례 그려봤다.


왜냐하면 강남역 이자카야 룸 안에서 예상 이상으로 솔직하고 대담한 5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나눴던 문장과 시선 사이사이에서 서로의 사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또 인정했기 때문이다. 온전히 언어적으로만. 그래서 더 강렬하게 끌려들었다. 오늘 만남은 서울 일탈의 시작이거나 끝이 될 수 있는 전환점이다. 초조함의 이유, 다양한 시나리오를 써보는 이유였다.




"박사님."


강남역에서 내가 상대방을 부르기로 결정한 호칭이다. 서로 여러 가지 제안들을 냈는데 적당한 것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지만 배제하고 싶은 호칭은 있었다. 오빠. 8살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바로 오빠로 넘어가는 식상함을 피하고 싶었다. 한쪽이 오빠면 반대쪽에 있는 나는 그럼 자연스럽게 동생이 되는 건데 그런 오빠동생되는 관계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파리에 산 지 이미 15년 가까이 되기에 언니, 오빠, 누나 같은 호칭이 없는 문화에 길들여져서 누구를 오빠라고 부를라치면 온몸이 오글거리고 부자연스럽다. 어쨌든 아직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씨" 보다는 "님"을 사용하고 싶었는데 "누구누구 씨"에서 오는 가벼운 올려줌이 마음에 걸렸고 어쩐지 나이가 더 있는 쪽이 상대방을 최소한 배려하는 의미로 연하에게 쓰는 용도처럼 느껴졌다. 순전히 한국어를 평소에 안 쓰는 결핍에서 나오는 이상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말을 서로 놓지 않는 형태로 오래가고 싶었다. 썸 타는 남녀 사이에서 한국어로 존댓말 쓰는 느낌이 관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지각도 역시 한국어에 대한 이상 반응인 걸까. 박사님이라는 결정에 이른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사람의 최종 학력이 박사이기 때문인데 이게 나에겐 존댓말을 써야 하는 밑받침을 만들어줌과 동시에 어쨌든 박사는 박사니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상수 이잖은 가. 나도 가방끈이 긴 사람 축에 속하지만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서울 최상위권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에 대한 존경심이 컸고 인텔리 성애자인 나에게 그 사람 부를 때마다 각인할 수 있게 된 거다.


그렇게 호칭을 정했으니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박사님, 하고 말머리를 뗀다.


“오늘 우리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 안은 어느덧 테이블마다 연인들로 가득 차 훈훈해졌고 이미 반 병을 비운 비노 베르데의 술기운을 빌어 질문인 듯 모놀로그인 듯 묻는다.


"아니면 같이 계속 술 마셔도 괜찮아요."


지극히 수사학적인 질문이기에 답변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이 답변에 대해 어떤 의미도 두지 않고 어떤 이중 해석도 하지 않는다. 그저 또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얼굴을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한 동안 바라본다. 기다리면서 생각해본 여러 시나리오 중 어느 하나 떠오르는 게 없다. 구체적으로 기승전결이 있는 시나리오를 생각해보기나 한 것일까. 특별한 형체나 구조 없이 단편적인 순간들만 머릿속에 부양했던 것이었겠지. 그의 몸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되는 순간. 입술과 입술이 닿았을 때의 느낌. 내 몸을 보여야 하는 순간. 손에서 만져지는 상대방 피부의 감촉. 색깔과 모양. 향과 음성. 4050 세대에 떠올리기엔 꽤나 순진한 생각들 같아도 사실상 대부분은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우려에 가깝다. 야한 꿈을 꾸면 항상 끝까지 가지 못하고 초반 작업을 길게 하다가 구체적인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에 깨곤 하는 그 수준에 머무른 조각들이다.




와인 한 병을 끝내는 것은 모래시계의 모래가 한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졌으니 첫 단계는 끝났다. 2시간을 그렇게 포트와인 바에서 보내고 밖에 나와 보니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다. 그의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감촉의 외투 팔 부분 어딘가에 손을 얹고 그가 연 우산 안에 들어가 스무 걸음을 한다. 다시 우산을 접고 비가 닿지 않는 반짝이는 네온 간판의 건물 문 앞에 다다르기 전까지. 그리고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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