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엄마가 밤이 좋다며 택배로 보내주셨다. 한국에 오니 좋은 점은 엄마의 택배를 자주 받을 수 있다는 점. 올해만 해도 감자, 바지락, 미역, 직접 심으신 강낭콩, 파김치, 직접 띄운 청국장 등등을 받아 감사하게 잘 먹었다. 덕분에 엄마의 택배 알림에 가슴이 콩콩 뛴다. 보내주신다는 음식 외에 항상 딸려오는 서비스들이 궁금한 것도 한몫한다. 엄마의 택배는 별일 없으면 다음날 도착한다.
이번 택배는 김치였다. 맛있다고 입소문 난 김치들을 여러 번 사봤는데 이상하게 입에 맞지 않는다. 김치를 먹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적은 양을 사는대도 처음엔 '맛있네' 였다가 며칠이 지나면 이상하게 맛이 바뀐다. 그래도 잠깐은 엄마의 김치로 걱정이 없겠다. 웃고 있는 사이 그 옆에 김치만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비스가 보인다. 밤이다.
지나가는 말로 작년에 엄마가 보내주신 밤이 진짜 맛있었다고. 미국 살 때는 가을이라고 밤 사 먹을 생각을 못했었는데. 밤 삶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으면 가을마다 사 먹을걸! 했던 말을 기억하셨던 걸까? 안 그래도 엄마한테 밤은 언제 나오냐고 묻고 싶었는데 엄마는 역시! 다정한 모녀사이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우리지만 이럴 때마다 엄마는 역시 엄마구나 싶다.
바쁜 10월을 보내는 와중에 엄마의 밤이 냉장고에 자리를 차지한 지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냉장고 야채칸을 절반이상 차지하고 있는 엄마의 밤. 시원하니까 잘못될리는 없겠지? 저렇게 맛있는 밤을 그냥 다 버리면 안 되는데. 엄마가 힘들게 보내주신 건데. 걱정이 무색하게 일주일 하고도 며칠밤을 지낸 나의 밤들은 아직 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잘 있어주었다. 다행이다.
밤을 큰 스텐통에 넣고 물을 부은 뒤 굵은소금 한 스푼을 떠 넣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렇게 해야 밤벌레가 제거된다고 했다. 이미 일주일이 넘게 냉장실에 있었으니 아마도 놈들이 있었다면 그 안에서 서서히 추위에 떨다가 가버렸을 테지만... 1시간 정도 담가둔 밤을 여러 번 물에 헹궈 냄비로 옮긴다. 한국 살림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큰 냄비가 없다. 작은 냄비에 절반을 덜고 나머지는 다시 삶아야겠다. 중불로 물에 올려 30분을 팔팔 끓인다. 바로 찬물로 옮겨서 식기를 기다린다.
이제 시작이다. 밤껍데기 까기. 어렸을 때는 이빨로 밤 가운데를 콱 깨물어 티스푼으로 퍼먹는 게 다반사였다. 그땐 그게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이빨이 시리다. 그리고 밤 하나 까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왜 엄마가 밤 먹자고 하면 티스푼을 먼저 가지고 오셨는지 살짝 이해가 간다. 한참을 까먹고 나서
"으아.. 이제 그만 먹을래!"
하면 엄마는 그제야 칼을 가지고 오셔서 얼마 남지 않은 밤을 까셨다.
작은 통 하나를 가지고 와 깐 밤을 하나씩 툭툭 던져 넣는다. 2개. 3개. 이제 막 까기 시작했는데 이미 밤껍데기가 수북하다. 이 작은 밤이 옷을 여럿 껴입었구나. 부드러운 옷. 딱딱한 옷. 야무지게도 차려입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안에 가끔씩 추위에 식어간 놈들이 보인다. 으에엑! 벌레라는 존재는 이렇게 작아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수가 있다니. 수북하게 쌓인 밤껍데기들 위로 벌레 먹은 밤들도 입을 벌리다 말고는 올려진다.
나와 똑같이 생긴 아이는 예전의 나처럼 내 옆에 앉아 내가 까놓은 밤을 맛있게 주워 먹는다. 너는 좋겠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까주니까. 까는 속도가 아이 먹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수북하게 쌓인 밤껍질이 무색하게 가져다 놓은 반찬통에는 남아있는 밤이 없다. 너도 이 밤이 맛있구나. 매번 사주던 마트표군밤이랑은 다른 포실함에 더 맛이 있지? 당분간은 밤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밤을 깠다. 밤을 까는 동안 두 번째로 올려둔 밤 냄비가 다 끓었다. 이건 이따가 저녁에 다시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