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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e Jan 05. 2024

루브르 대신 쌀국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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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오기 전에 지인이 예전에 함께 프로젝트를 했던 대만 친구가 내가 숙소를 예약한 동네에 산다고 했다. 한 달이나 있을 거면 동네친구 겸 대화 상대 한 명 있으면 좋지 않겠냐며 소개해줬다. 파리에서 영화 학교를 다니는 촨은 집 하나를 얻어 3명의 다른 나라 친구들이랑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파리에 도착하는 날 그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하자고 했다. 같이 요리하고 저녁을 먹으면 좋겠다길래 나도 잡채를 하려고 당면이랑 간장 같은 기본양념을 챙겼다. 노란색 믹스커피도 해외에선 인기가 많다길래 선물로 준비했다.


  촨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내가 머무는 숙소에서 큰길 반대편 골목에 있는 집에 살고 있었다. 큰길 지하도 앞에서 만났는데 조용한 동네여서 금세 알아봤다. 마트에서 간단히 야채를 사야 한다고 했더니 그냥 가자고 했다. 슬리퍼를 끄는 촨을 따라 원피스를 찰랑이며 뒤따랐다. 집에 따라 들어갔는데 조용했다. 촨은 나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좁은 방에는 침대와 책상이 거의 차지했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촨은 책상 의자에 앉았다. 책상 선반에 있는 여러 개의 키홀더 중에 하나를 집어 나에게 건넸다. 대만 기념품이었다.  


  "친구들은 어디 있어? 집에 야채는 뭐가 있어? 나는 한국요리 잡채를 하려고 준비했어" 촨은 말이 없었다. "아직 안 왔어?" "없어." "응?" 촨이 대만식으로 굴리는 영어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했고, 한국식으로 하는 나의 영어를 촨도 잘 못 알아듣지 못해 대화가 어려웠다. 하지만 친구들은 아무도 없고, 저녁식사고 파티는 물 건너간 게 확실했다. 그리고 이 집엔 방문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촨과 그의 침대에 걸터앉은 나만 있을 뿐이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걸까?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다. 화도 났다.  "우리 나가서 좀 걸을까?"  


  어둑해진 거리는 조용했다. 가을날의 선선한 날씨에 촨은 춥다고 했다. 하늘이 예뻤고, 낮게 내려앉은 낯선 마을도 참 좋았다. 서로의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며 우리는 자꾸 말문이 막혔다. 학교에서 촨은 잘 알아듣지 못해 과제도 제때 내지 못하는 바람에 낙제를 하고, 교수를 만나서 설득해야 하는데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교수는 화를 내며 내쫓았다고 했다. 겨우겨우 어찌어찌 대화를 나누다가  촨은 난데없이 벨기에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니콜라는 한국어를 정말 잘해. 너를 소개해준다고 하면 니콜라도 좋아할 것 같아."


  6일짜리 뮤지엄패스는 루브르박물관에서 개시했다. 생각만큼은 아니지만 줄은 길었다. 입구에서는 먼저 가방 엑스레이 검사를 했다.  바구니에 재킷과 가방을 담으면서 여권과 카드지갑, 그리고 뮤지엄패스는 손에 꼭 쥐었다. 꼭 챙겨야 하는 중요한 것들을 쥔 손가락에 힘을 줬다. 시커먼 커튼 뒤로 넘어오는 가방은 투시라도 할 듯이 째려보고 있다가 엑스레이를 지나자마자 바로 챙겨 들었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으셨던 아주머니께서 목걸이도 옷 속에 숨기라고 하셨던 말을 생각하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재킷을 입고 오디오 가이드 티켓을 구입하려고 줄을 섰다. 사람들이 자꾸 힐끔힐끔 쳐다봤다. 쯧쯧 하며 고개를 가로로 젓는 사람도 있었고, 위아래로 나를 훑는 사람도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고, 급히 시선을 회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생각이 스쳤다. 눈으로 손으로 더듬으며 옷매무새를 살피고, 가방 문이 열렸나 싶어 가방도 살폈다. 도대체 왜냐고 묻고 싶은데, 어딘가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나를 비춰봐도 멀쩡해 보였다. 도대체 왜지? 그 사이에 오디오 가이드 티켓을 구입했다.  


  입장 티켓팅 줄은 길었지만, 뮤지엄패스 줄은 짧았다. 나의 준비성을 칭찬하며 뮤지엄패스 줄에 섰다. 앗! 그런데 손에 들려있어야 할 뮤지엄패스가 없었다. 여권과 지갑 사이에 비슷한 크기의 뮤지엄패스를 끼워 들고 있었다. 떨어질까 봐 손가락에 힘도 꽉 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없어진 거지? 좀 전에 날짜를 기입하고 개시했으니 호텔에 두고 온 건 아니다. 내 모든 기억이 의심스러워 주머니며 가방을 다 뒤지고, 기념품샵에서 전화를 빌려 숙소에도 전화해 봤다. 있을 리가 없지.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루브르 피라미드 꼭짓점을 누가 손가락으로 잡고 뱅글뱅글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네모나고 세모난 세상이 동글 뱅뱅거리며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누군가 그걸 쏙 뽑아간 건가? 지갑과 여권과 크기도 비슷해서 눈에 띄게 튀어나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걸 가져가지? 이상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납득이 되는 것도 같았다. 15만 원을 그냥 날렸다. 오디오가이드는 대체 왜 산 거야. 하... 김이 팍 새서 루브르고 뭐고 그냥 나왔다. 오디오 가이드 티켓은 사려고 서있는 줄에서 눈에 띄는 한국인에게 줘버렸다.


  "촨! 나 시간이 생겼어." "너 뮤지엄패스 기간이라고 니콜라는 다음 주에 만난다며." "뮤지엄패스가 잃어버렸어." 촨이 알려준 주소는 쌀국숫집이었다. 파리에서 무슨 쌀국수야. 나도 모르게 삐죽거렸다. "오늘 운이 좋네. 문을 열었어. 여기 진짜 맛있는 곳이야." 촨이 추천해 주는 대로 먹었다. 엄청 맛있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는데 기분 탓인지 그냥 그랬다. "맛있는 커피를 먹고 싶어." 니콜라의 추천을 막으면서 촨이 앞장섰다. 니콜라와 나는 뒤따랐다. 니꼴라는 촨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언어교환을 한다고 했다.


  도착한 곳은 버블티 카페였다. 촨은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걸까? '파리의 커피를 너무나 기대하고 있다고 난. 카페다운 카페에 앉아서 제대로 한 잔 딱! 마시길 원했다구.' 소심한 나는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 상기된 표정으로 촨이 말했다. "여긴 정말 대만이랑 똑같은 버블티야. 파리에 이런 곳은 여기 뿐이야." "한국에도 버블티는 정말 많아 촨. 여기에 커피는 없네?" "여기에선 버블티를 마셔야지. 정말 맛있는 곳이니까." 니콜라 덕분에 촨과 대화가 잘 통하게 되었는데, 대화가 통하는 만큼 화가 더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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