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e Jan 12. 2024

백조의 섬에서 하늘의 활을 맞다

5


  니콜라는 작고 왜소한 체구의 벨기에인이다. 순수문학을 좋아하는 감수성 예민한 21살 대학생이다. 한국어도 중국어도 잘해서 나와 촨 사이의 단단하던 소통의 벽은 니콜라 덕에 흐물 해졌다. 파리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찬 여행객에게 쌀국수와 버블티를 소개한 촨에 대해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나를 간파하고서는 "촨은 너에게 파리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별미들을 소개해 주고 싶었던 거야. 물론 너는 파리에서 아주 흔한 파리의 음식들을 즐기고 싶겠지만."이라고 말해주었다. 

  

  니콜라에게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푸아그라를 꼭 먹어보고 싶다고 하니까 마레지구 레스토랑을 추천해 줬다. 내 수첩에 적힌 '셰익스피어인컴퍼니'를 보더니 서점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진짜 파리스러운 서점이라며 한 곳을 추천해 줬다. 그리고 여행객보다 파리지앵들이 더 사랑하는 곳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시뉴섬을 추천해 줬다. 여긴 무조건 꼭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니콜라의 표정을 보며 정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니콜라는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도 보였다. 한국 소설 작품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뭘 추천해야 할지 허둥거리면서 취향에 대해 물었다. 니콜라는 취향을 떠나 가장 한국적인 작품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럼 가장 프랑스적인 작품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으니까 레미제라블이나 보바리부인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황순원의 소나기, 이청준의 남도사람, 김동리의 역마 같은 작품들을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책으로 선물하면 좋겠다 싶었다. "다음에 한국에 온다면 꼭 선물할게" 진심이었다. 


  니콜라는 "시간이 괜찮다면 지금 나랑 같이 이 서점에 가볼래?" 했다. 촨은 바쁘다며 먼저 갔고, 니콜라는 나를 데리고 서점에 갔다. "이쪽이 프랑스 전통 문학이고, 이쪽이 현대 문학이야. 여긴 말랑한 메거진이고, 여긴 딱딱한 매거진이야." 사실 왜 그곳이 프랑스다운 서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꼼꼼하게 가득 찬 책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낯선 글자들이 뿜어내는 익숙한 책먼지 냄새도 좋았다. 책을 한 권 사고 싶었다. 니콜라는 '레미제라블'이나 '보바리부인'을 사라고 권했다. 


  "혹시 아니에르노라는 작가 알아?" "아니." "몇 년 전에 너무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 있는데 그 책을 사고 싶어. 한국어로는 단순한 열정이야." 니콜라는 권하지 않았다. 지금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지만, 10년 전 니콜라는 아니에르노가 프랑스를 대표할 수는 없다고 했다. B급 작가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나는 며칠 후에 벼룩시장에서 아니 에르노의 책을 한 권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책은 손톱깎기를 사면서 덤으로 얻는다. 개이득. '해프닝'이라는 소설이다.




  시뉴섬. 백조의 섬은 정말 산책하기 아름다운 곳이었고,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앞뒤좌우가 서로 다른 풍광을 가진 곳이었다. 센 강 한가운데에 자리한 기다란 산책로였는데 에펠탑과 일직선상에 존재했다. 에펠탑을 등지고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도착지점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었다. 그러니까 에펠탑을 보며 되돌아오면 자유의 여신상이 내 뒤를 지킨다. 강 건너 한쪽은 역사적인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건너편에는 새 빌딩이 가득 찬 역동적인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원래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했던 건데,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때 미국이 프랑스에 크기가 작은 복제품을 만들어 선물했다고 한다. 그걸 에펠탑과 마주 보도록 인공섬을 만들어 산책로를 조성했는데 그게 바로 백조의 섬이다. 아마도 물 위에 유유히 떠있는 백조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려나? 참 한적하고 예쁜 곳이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도 없어서 조용하고 한적했다. 날이 우중충했지만 그래도 가을날 촥 내려앉은 무거움이 또한 매력적이었다.   


  큰 나무와 낮은 정원들이 참 조화로운 백조의 섬을 한창 즐기는데, 비가 쏟아졌다. 얼른 큰 나무 밑으로 가 비를 피했다. 파리의 비는 순간 잠시 피하면 금세 그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 총총 뛰어다니며 비를 피하는 내 처지가 참... 오른쪽은 백 년 전, 왼쪽은 현재, 그럼 여긴 50년 전이 되는 건가? 저긴 뉴욕, 저긴 파리, 그럼 그 가운데는 어디지? 비 때문인지 너무도 실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넘나드는 동안 비는 그쳤다. 우산을 가져올 걸 그랬다. 오직 꽃과 나무들만 있는 이곳엔 우산을 살 데도 없다.


  비를 쏟은 하늘엔 해가 쨍했다. 그래도 언제 또 비가 올지 모른다. 구름이 흘러가는 쪽과 흘러오는 쪽을 올려다봤다. 언제 내 머리 위로 올진 모르겠지만 먹구름이 또 밀려오고 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개미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먹구름보다 더 빠르게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바로 그때 선명한 쌍무지개가 내 눈에 들어왔다. 살면서 그렇게 선명한 무지개는 처음 봤다. 게다가 쌍으로.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럴 때 아무도 없는 것이 속상했다. 온 사방을 눈으로 다 훑어도 오직 혼자다.


  강 건너 이쪽에도 저쪽에도 사람들이 지나는데, 여긴 진짜 한 명도 없다. 여긴 진짜 현지인들만 즐기는 산책로인 건가 싶기도 했다.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들도 많은데 요기를 안 내려와 보다니. 소리라도 질러서 쌍무지개를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아무도 없을 수가. 정말 딱 그때, 공원관리인이 조그마한 전동차를 타고 나타났다. 뭐 하시는 분이신가 유심히 봤더니 1/5도 차지 않은 휴지통을 비우고 있었다. 자동차의 속도도 느리고 그의 손도 느렸다. 


  "헤이~ 엑스큐제 무아, 봉주흐~" 그 남자는 봉쥬흐~라고 인사만 받아주고 자기 일만 했다. "룩앳더 레인보우."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레인보우! 레인보우! 저기! 그는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난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놈의 레인보우만 외치며 하늘에 구멍을 뚫을 듯이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그는 귀찮은 듯 하늘을 쳐다봤다. 무지개를 발견하고도 아~ 하긴 했지만 별 감흥은 없어 보였다. 흔한 건가 파리에서는? 무안했지만 누군가와 이 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엉 프랑세" 나는 다시 하늘을 찔러대며 저걸 프랑스어로 뭐라고 하는지 물어봤다. 아컹씨엘. 사전을 찾아봤다. "arc-en-ciel" 응? 하늘의 활? 앗! 하늘이 활을 쏘는 거구나. 번개를, 아니 활을 맞은 것 같았다. 하늘의 활이라니. 어떻게 그렇게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머리가 쨍~ 했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틈에 공원관리자는 미소를 흘리며 가던 길을 쌩~하니 가버렸다. 날 향한 활이 사라져 가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활을 맞은 건가? 어디 맞은 거지? 다시 비가 쏟아졌다.
























이전 04화 루브르 대신 쌀국수라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