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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Aug 26. 2024

어바웃 도덕과 지능

어바웃 시리즈 2

정말 오랜만의 어바웃 글이다.. 

마지막 글과 비교해 봤을 때 딱 2달 만이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써야 할까 생각하다가 떠올린 오늘의 주제는 

'도덕과 지능'

영화나 드라마 등 여러 작품에서 주인공은 대개 도덕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때로는, 어쩌면 꽤 자주 주인공보다도 화제가 되는 존재는 바로 '악역'이다. 사회에서 규정한 도덕의 범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악역들은 주인공과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주기도 하며, 작품을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대표적인 예시인 '조커'는 주인공인 배트맨보다도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개봉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고 있다.

이렇듯 부도덕한 캐릭터, 더 나아가 부도덕한 인물은 어느 정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여기까지가 도덕이다

이제는 지능이다

과거에는 IQ (지능지수) 라는 표준화된 검사를 통해 도출된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성적인 지능을 알 수 있었다. IQ가 높으면 천재 소리를 들었고, IQ가 낮으면 '돌고래랑 다를 바가 없는 사람' 등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최근에 들어서 EQ (감성지수) 가 등장했다. EQ는 인간의 정서적 능력을 의미한다. 자신이나 타인의 감정을 얼마나 잘 인지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 준다. 단순히 IQ만으로는 책정할 수 없는 인간의 '지능'이 있다는 것, 그리고 AI가 등장하면서 인간만이 가진 지능에 대해 탐구한 결과 주목받기 시작한 영역이다. 사람들은 IQ 뿐 아니라 EQ 까지 높은 엘리트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도덕은 어떤가?

나는 도덕도 지능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적 유전자

사람들의 이타적인 행동은 과연 이타적 행동 그 자체로만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군가가 해 보이는 이타적인 행위에 대해 '숭고한 희생'이라며 온갖 찬사를 갖다 붙인다. 동물들을 볼 때도 유사한 상황이 나타나면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며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이타적인 행위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근원적 동기까지 이타적이라고 볼 수 있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오래 전에 읽어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벌의 희생' 예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벌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에 외적이 침입한다. 이때 한 벌이 나서서 벌침을 쏘아 집단의 추가적인 피해를 막는다. 안타까운 것은 이 벌이 꿀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 꿀벌은 장렬하게 전사한다.

이것이야말로 이타적이고 숭고하며 희생정신의 표본인 도덕성 아닐까? 

리터드 도킨스는 아니라고 답한다. 만약 개별 개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벌이 침을 쏘아 침입자를 물리치고 죽는 희생 행위는 벌이 속한 집단에는 유익하지만 죽은 벌에게는 불리한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유전자 관점에서 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벌 한 마리의 죽음을 통해 수 많은 벌의 존속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벌 한 마리의 희생은 유전자에게 있어 단지 껍데기 하나를 버리는 행위에 불과하며 이를 통해 자신과 동일한 (혹은 비슷한) 수많은 유전자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유전자가 가지는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자기 복제' 능력 때문이다.

(블로그 https://blog.naver.com/sonss1992/221471646910 참고 내용)


이기적 유전자에서 희생 정신 너머의 도덕성을 거론하기에는 약간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서 신선한 충격이었던 부분이다. 과연 생명체의 이타적 행동은 그 동기까지 순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러한 행동들은 유전자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것은 아닐까? 뭐 일종의 지능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도덕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Giver, Taker and Matcher

어렸을 때의 나는 도덕성에 대한 고전적 조건형성이 잘 된 아이였다.

내가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이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사회에서 정해 놓은 규율을 어기지 않으면 어른들의 칭찬과 달콤한 보상이 따라온다는 걸 학습했다. 도덕성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보기에 앞서 나는 적당한 도덕이 주는 안락함이라는 안정적 틀을 마련해 놓았기에 굳이 반사회적/비도덕적 행동이라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랬던 내 패러다임이 큰 타격을 받은 건 중학교 2학년이었다.

불행히도 당시 반의 분위기는 전교에서 최악 중 하나였고, 아이들은 중2병을 온 힘을 다해 만끽했다. 수업 시간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하거나 선생님께 대들거나 돌아가면서 따돌리는 등.. 이것저것 일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일이라면 같은 무리 아이들이 점심 시간에 외출증을 쓰고 시간이 끝나고도 대놓고 학교로 돌아가려 하지 않은 사건이다. 나는 생기부에 문제를 만드는 게 싫어서 그냥 먼저 학교로 제때 컴백했지만, 솔직히 왜 스스로 문제를 자초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여기서 애덤 그랜트의 'Giver, Taker and Matcher'의 개념이 등장한다.

애덤 그랜트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눈다. 관계에서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Taker, 받는 것보단 주는 것에 익숙한 Giver, 그리고 받은 만큼 주는 Matcher이다.

이 글에서는 도덕성이 낮은/결여된 사람을 Taker라고 편의상 칭한다. 반대로 도덕성이 높은/충만한 사람을 Giver라고 칭한다.

(완벽히 대응되는 개념은 아님)

중 2때는 수많은 Taker들을 만났다. 

그 전까지는 내가 10을 주면 적어도 10을 주거나 그 이상을 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면, 그 때의 주류가 되었던 taker들은 10을 주어도 고맙다는 표시 하나 하지 않은 채 그 다음 10을 요구하거나 간신히 1을 주곤 했다.

왜지? 왜 저렇게 사는 걸까.. 에 대해 생각도 많이 해 보고 어쨌든 힘들어했다. 

반에는 taker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학기 말로 갈수록 분위기는 더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제멋대로 뛰어놀았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세 유형의 인간 군상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Giver는 정녕 암담한가

여기서 더 절망적인 사실은 애덤 그랜트의 연구 결과였다. 

그는 조직 내에서 사람들을 위의 세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 유형들의 성과를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는 성과의 최하단에는 Giver들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암담하다..

Giver들은 Taker들에게 도움을 주느라, 혹은 조직 내의 다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느라 자신의 시간과 효율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결국 Giver들은 무엇인가? 타인을 돕고 그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이 도덕의 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로 점철된 현대 사회에서는 도덕성이 차지하는 자리는 정녕 소멸해 버리고 만 것인가?

여기서 위안이 되는 사실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성과의 최상단에도 Giver들이 위치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생긴 긍정적인 시너지는 결과적으로 그들의 업무에도 도움을 주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본인도 공부가 되는 것과 유사한 원리인 것 같다. 다행히 아직 도덕성에는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다!

Taker는 정녕 승리하는가

위안이 되는 결론이다. Taker는 빠른 성공을 얻을지는 몰라도 빠른 몰락을 마주한다. 

그 이유는 아직 다루지 않은 Matcher라는 인간 군상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사회의 약 절반 정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더치페이의 정신을 가진 Matcher들이 차지한다. 이들은 Giver과는 다르게 Taker들을 마주할 경우 이들의 이기적인 행동에 분노하며 벌을 주려는 경향이 있다. 

결국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려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이 행위가 들통나 불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꽤 많은 Taker들이 있다. 

평생 Taker였던 적이 한 번도 없냐고 물어보면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강력한 Taker들을 만났다.

솔직히 처음은 억울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도덕적인 측면에서도)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래서인지 좋은 성과를 내는 것 같아서 부러웠다. 왜 저 사람들은 인성이 별로인데도 자기가 원하는 성공을 잘만 얻어낼까? 그 사람들에 대한 감정보다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것 같아서 싫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남는다. 

자기가 맡은 일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냥 놀고 있었던 아이들에게 "자기 일을 똑바로 한 아이들이 바보가 되는 상황이 싫다."고 하셨었던 것 같다. 그 말에 동감한다.. 솔직히 Taker들이 얼마나 잘 되는지가 정말로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냥 자기 일을 정직하게 한 사람들 혹은 Giver들이 바보가 되어 성공하지 못하는 상황이 싫었던 것이겠다.

그치만 돌이켜 보면 Taker들도 마냥 성공하지는 않았다.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거나 그 사람들을 배척하지는 않지만, 결국 이번에도 자기가 원하는 용건이 있을 때 다가 오는 사람이 Taker라는 학습을 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사람들은 전만큼 Taker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강력한 Matcher를 만나면 크게 당하겠지만 어쨌든 주변의 Giver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거리를 둔다는 것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물론 더 긴 시간 보아야 그 추이를 확정지을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

Taker 없애기

그렇다면 Taker는 없앨 수 있을까? 

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내 경험상 그렇다. 지금은 집단에서 어떤 Taker들이 보여 그들을 없앤다 하더라도, 그 때는 Matcher였던 사람이 슬슬 변해 Taker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Taker가 집단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등등.. 경우의 수는 여전히 많다. 인성을 아주 심도있게 본다는 학교에 들어가서도 면접을 통해 한 번 걸러냈음에도 암담한 인성을 가진 친구들을 여럿 보면서 느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Taker를 없애는 것이 이 사회의 능률을 높이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Taker 약화시키기는 가능하다. 한 사회가 제기능을 잃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Taker들이 자리했을 때와 Giver들의 번아웃이 왔을 때이다.

적어도 Taker들이 당연하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눈감아주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것, 그리고 Giver들의 도움에 대해서 충분히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알고 보답할 줄 아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 그나마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Giver의 두 유형

그럼 앞서 살펴 보았던 성과로 대비되는 Giver들의 유형은 왜 발생하는 것인가?

이건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내 베스트푸렌드와 이야기를 하다 문득 의문이 든 주제이다. 

여기에 대해서 흥미로운 의견을 수집할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무지성'으로 퍼주는 Giver는 조직에서의 성과가 저조하겠지만, 현명하게 줄 줄 아는 Giver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도덕은 지능인가

그래서 도덕은 일종의 지능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도덕성이라면 더더욱 지능이라고 생각한다.

앞선 세 유형의 사람들의 결말을 비교해 보았을 때에도 알 수 있다. 

비교적 낮은 도덕성을 자랑하는 Taker는 단기적으로는 괜찮은 성과를 낼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도움되는 삶의 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반면 Giver는 (올바른 방향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물론 이것도 비교적 정상적인 분위기의 집단 or 사회에 속해 있을 때의 이야기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다. 적당한 지능을 가졌다면 도덕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왜 도덕을 지능과 결부시키는가

사람들은 도덕적인 삶을 살라고 이야기한다. 

도덕은 오래 전부터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다루어 온 주제이기도 하다. 사실 도덕적인 삶을 살 고차원적인 이유는 충분하다. 옛날 성현들은 어려운 용어들을 써 가며 사람들에게 제발 좀 도덕적으로 살라고 설득한다.

이런 고차원적인 이유도 참 좋지만 나는 명백하게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로 설득당하고 싶었다.. 

고차원적이고 숭고한 신념은 아직 깨져 버리기가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아직 내게는 버거운 이상적인 개념들 말고 그냥 이게 도덕이 결국 득을 가져다 준다는 증거를 찾고 싶었던 자기위안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로운 게 있을 때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협조적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지능과 결부시키면 상당히 예민해지면서 잘 지키려는 것 같기도 하다 ㅋ_ㅋ 

그래서 나도 도덕/비도덕의 순간을 가르는 상황이 올 때 그냥 위와 같이 생각한다. 

내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여럿 존재할 수도 있다. 

아주 어쩌면 부도덕한 사람이 진정 성공할 수도 있다. 성공한 CEO들의 대부분은 소시오패스라는 결과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냥 나는 이렇게 믿고 싶다.. 

엄청나게 숭고한 덕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적당한 도덕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행동을 후회하지 않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믿음이다. 

그리고 실제로 부도덕적인 사람들을 보면 딱히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글 제일 처음에 말했던 매력적인 악역은 작품 속에서나 존재하지 현실의 악역은 꾸지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우리는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은 나에게는 그냥 간단하다.

도덕은.. 지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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