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시리즈 2
막상 제목을 쓰고 나니 어감이 웃긴 것 같기는 하지만.. 덤덤함과 담담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아주 옛날부터 덤덤한 사람이 부러웠다. 사서 걱정을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불안 지수가 높았기 때문에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지치고 힘들 때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성과와 관계없이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큰 동요나 흔들림 없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알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 워너비였다. 그래서 나는 좀 덤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최근에 '담담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며 덤덤함과 담담함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덤덤과 담담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전을 검색해 보면 정의내린 의미는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여기서는 사전을 생략한다. 오로지 나의 느낌대로만 정의하는 덤덤과 담담은 어떤 모습인가 곰곰 떠올렸다. 우선 나에게는 덤덤보다는 담담함이 더 높은 경지 ? 에 도달한 사람의 모습이다.
둔함 =/= 덤덤함
두 개를 비교해보기 전, 나에게 덤덤이란 둔함과는 아예 다른 맥락으로 다가온다.
둔함은 말 그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역경과 고난이 다가왔을 때 둔한 사람이 가만있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경지에 도달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게 역경인지 모르는 것 뿐이다.. 치과에서 마취를 하고 나서 마취가 되었는지 확인하는 때가 있다. 그때 환자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 환자가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마취제를 넣어서 말 그대로 감각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내게 둔함은 이런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내가 되고 싶은 건 둔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둔한 나름대로의 장점이야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맥락은 그게 아니다.
덤덤함
덤덤한 사람의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떠올려본다면 '그냥 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본인에게 주어진 일이 있다면 그걸 묵묵히 수행해 내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이득을 보니 손해를 보니 하나하나 복잡하게 따지지 않으면서 그냥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크게 연연하거나 집착하는 대상도 없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느 하나를 위해서 지나치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허허 넘어갈 수 있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분위기에서 멋있음을 느낀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 다 좋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줄 알고 웃어줄 수 있는 것은 내면의 여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담담함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담담이란 덤덤의 상위 단계로 다가온다.
이제는 외부의 자극 뿐 아니라 내부의 요동에 대해서도 묵묵히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는 담담함의 이미지이다.. 사실 이 두 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다만 외부보다 더 다스리기 어려운 게 내부의 요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언가 더 통달했다는 느낌이 드는 게 담담함이었다.
사실 요즘이 되면서 더 이런 덤덤함과 담담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외부와 내면에는 정말 수많은 진동과 요동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각한 건 아니고.. 당장 유튜브만 들어가도 그렇다.
유튜브에 접속하게 되면 많은 영상들이 뜬다. 개중에는 분량이 많고 호흡이 긴 영상들도 많이 있지만, 유튜브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쇼츠로 넘어가게 된다. 1분이 넘지 않는 쇼츠를 보게 되면 호흡은 빨라지고 생각은 적어진다. 수많은 짧은 영상들이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데, 당장 재미있기는 하지만 보고 나면 왠지 모를 찝찝함과 자극은 잔존하게 된다..
이것 말고도 위의 단어들이 떠오르는 예시는 많지만 이쯤 하고
덤덤과 담담을 생각하다 보니 얼핏 방파제가 떠올랐다.
방파제
방파제는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거친 파도를 막아 항구 안의 수면을 잔잔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바다에 쌓은 둑을 말한다. 평소 쓰이는 방파제는 표면적으로 외부의 자극이 내부에 과도한 영향을 주는 것을 막아 준다는 의미에서 외부 -> 내부의 과도한 유입 차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걸 위의 덤덤함과 담담함에 적용시켜 본다면 양방향 모두가 해당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덤덤함은 기존 방파제의 의미처럼 외부 -> 내부의 과도한 자극 유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참 많이 받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자극은 당연히 자양분이 될 수 있지만, 자칫 외부의 파도가 너무 거셀 때 or 그 자극을 여과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면 사람은 바닷물에 쫄딱 젖고 만다.
방파제를 바탕으로 외부의 자극에 속절없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모습은 내게 덤덤함으로 다가온다.
담담함은 그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사람들은 간혹 내면의 요동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나 신경질을 낸다. 때로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도 내면의 요동을 전달하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방파제가 있다면 내면의 요동을 외부에까지 그대로 거센 파도의 형태로 내 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면의 파도의 원천 자체를 없애는 건 정말 도인들에게나 나타나는 것 같지만, 원천은 존재하더라도 얼마든지 방파제로 그 영향력을 줄일 수는 있다.
방파제를 바탕으로 내부의 자극을 여과해서 적당한 수준으로 나를 내보일 수 있는 모습은 내게 담담함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런 방파제 만들기가 선천적으로 잘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냥 부러운 거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밀려들어오는 파도에 지레 겁을 먹고 방파제 만들기를 내팽겨친 채 부둣가를 아예 황량한 땅으로 버려 두기를 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방파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거센 파도에 쫄딱 젖을 수도 있다. 때로는 자칫 파도에 휩쓸릴 수도 있다.
이런 모종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파제 쌓기는 분명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파도가 무서워 내륙에만 있기에는 바닷가만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고, 그 시행착오를 통해 적절한 방파제를 쌓을 수 있다면 그만한 성장이 또 있을까 싶다.
어느덧 9월이 시작되었다.
더위 먹느라 정말 고통스러웠던 여름이 조금은 기세를 낮추었고 이제는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누군가는 새로운 학기를 시작할 것이고, 누군가는 새 계절을 맞아 새로운 마음을 다짐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다짐을 안고 가는 가을의 시작점에서 덤덤함과 담담함에 좀 더 가까워지는 방파제를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해서 쌓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