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시리즈 2
모든 것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라는 말은 극적인 장면에서 종종 접했다.
주인공은 역경을 만나고, 일은 풀리지 않을 때 주위 사람들의 ‘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라’는 말에 주인공이 흔히 하는 말이다. All or nothing을 외치며 세상에 패기있게 맞서는 주인공에게는 극 후반부 즈음 그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들을 발견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날 때가 많다.
본인의 인생을 혹은 생활을 배팅할 수 있는 all or nothing의 용기는 진심으로 멋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던 건 핏방울이 떨어지도록 드럼 연습을 하던 영화 <위플래쉬>의 주인공을 보면서부터였다. 본인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며 차가운 얼음물에 부르튼 손을 넣어가며 연습하던 앤드류의 모습은 내가 추구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과연 이게 맞나 싶은 순간이 있다. 올해 들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그 중심에는 all or nothing이 자리하고 있었다.
All과 nothing의 시점
우선 all의 기준이 뭔지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All이 아니면 nothing이라는 건 잘 알겠다.
그럼 all에는 언제 도달할 수 있다는 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갖는 것, 외제차를 끌면서 사는 것, 투자에 성공하는 것
언제가 all이 될 수 있는 순간인가?
각 시기별로 all과 nothing이 정해져 있다 해 보자. 그래도 이 찝찝함은 가시지 않는다.
20대에 좋은 학교릉 나왔지만 내 30대가 그만큼 화려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all이었다가 nothing이 되는 건지, 그럼 숫자 0과 1로만 표현되는 프로그래밍 같은 삶이 진정 우리가 추구하는 all or nothing의 삶인지 의문이 든다.
만약 삶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모여 all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럼 죽기 전까지 계속 달리다가 삶이 끝나고 나서야 내 인생의 성적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사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nothing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인가…
어느 방면으로 곰곰 생각해 보아도 나를 만족시킬 만한 답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All or nothing의 기준
이전에는 막연히 all과 nothing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더 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니 하나의 all만으로 정의내리기에는 너무 다양한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다.
나 자신에게도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가서 전문직이 되고 외제차를 끌고 투자를 해서 좋은 집을 얻으라고 이야기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훨씬 많다.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갈아넣고 밤낮없이 연습에만 매진허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돌보아야 할 사람이 있을 수도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익명의 힘을 빌려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저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의 기준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는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판단이었던 것들은 경험과 주변인의 충고를 통해 사실 그렇지 않았음을 느꼈던 때도 많다. 그러나 내 안의 중심이 잡힌 후에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들을 수 있는 것이지 내 생각은 없는 채로 무작정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그것을 충족하는 게 all의 기준은 아닌 것 같다.
왜 이걸 생각하게 됐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