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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름 Dec 29. 2022

선물 같은 아이들

(후회하다: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치다.)


"엄마. 엄마는 올해 꼭 기다리거나 바라는 거 있으세요?"

"어. 어떤 거? 생각 좀 해보자. 뭐가 있을까?"

"우리 아들 기말고사 잘 보는 거."

"역시. 엄마랑 이모는 진짜 대단해요. 어쩜 모든 대화가 공부로 끝날까요?"

"야. 학생 엄마들은 다 똑같지. 아마 다른 엄마들도 그럴 거야."

"넌 뭐 기다리는 거 있어."

"네. 크리스마스 때 눈이 왔으면 좋겠어요. 화이트 크리스마스요. 그냥 생각만 해도 설레고 기분 좋잖아요."

중2 아들. 세상 모든 축복은 자기가 다 받은 환한 얼굴로 마냥 기쁜 듯 이야기한다.

요즘 사춘기는 사춘기인가 보다. 책을 고를 때도 겉표지를 보며 디자인과 제목이 마음에 들어야 읽고, 모든 대화 끝은 낭만이다. 엄마는 낭만이 없다며 항상 날 타박하지만 나도 단발머리 10대 소녀였던 적이 있는 아줌마이기에 아들의 낭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들은 오늘부터 자기 전에 모든 신께 '꼭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빌고 잔단다. 어디 그래봐라. 그냥 '시험 잘 보게 해 주세요'가 더 현실성 있지 않을까 싶지만 낭만 없는 40대 아줌마의 말을 10대 사춘기 아들이 받아들이겠는가. 




심상치 않다.

하루종일 눈이 내린다.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둔 12월 22일.

'갑작스러운 폭설로 학생안전을 위하여 학사운영시간을 변경합니다.'

큰아이 학교에서 단축수업 문자가 왔다. 다음날 아이들 학교에서 임시휴업 문자가 왔다. 우리 지역은 눈이 30센티 이상 쌓였다. 아들 기도를 모든 신들이 들어주셨다. 그것도 아주 통 크게 들어주셨다.








메리크리스마스.

둘째는 선물을 기다리느라 새벽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눈길에 산타가 늦었는지 선물은 아침에야 트리 밑에 놓여있었다.

"엄마. 산타가 몇 시에 왔을까요?"

"어제 새벽 2시에 일어나서 기다리다가 4시쯤 자고. 또 5시쯤 일어나서 확인해도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선물이 놓여있었어요. 그것도 제가 진짜 갖고 싶었던 걸로요. 진짜 기분 좋아요."

둘째의 환한 얼굴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산타가 못 오면 어쩌나 밤새 걱정했다는 딸.

창문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하얗고 눈부셨다. 집 앞 공원은 3일 내내 내린 눈으로 길조차 보이지 않았고 우린 고립되어 갇힌 것 같았다. 신랑의 출근이 걱정이다. 

"여보. 오늘도 출근하려면 힘들겠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뭐 어때. 이미 눈 온 거 화이트크리스마스여서 좋다 생각하고 즐겁게 즐기면 되지."  

역시 긍정남의 대답이다. 신랑은 모든 면에 긍정적인 사람이다. 며칠을 출퇴근하는데 4시간 이상 걸리는데 힘들다는 말 한번 없고 제설작업이 잘됐네. 못됐네 불평 한마디 없다. 그런 그에게 집에 있는 내가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으니. 

'그래 그럼 나도 즐기면 되지. 이 눈을 즐기며 화이트 크리스마스 보내야지. 남들은 눈썰매장도 가고 스키장도 가는데 우린 바로 집 앞이 눈썰매장이네' 신랑 말 한마디에 나도 긍정녀가 되기로 했다.

큰애 역시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그토록 바라던 화이트크리스마스라며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아침부터 꽃단장이다. 



"우리 얼른 챙겨서 나가자. 날씨가 추우니까 옷도 따뜻하게 입고 장갑 끼고 귀마개도 챙기고. 알았지."

우린 무장을 하고 썰매를 챙겨 나왔다.

이미 공원엔 눈썰매를 타는 사람들,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들, 눈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눈썰매 타며 소리도 질러 보고 눈사람도 만들고 깨끗한 하얀색 도화지에 그림 그리듯 발자국도 남겨 보았다. 푹푹 빠지며 나는 뽀드득 소리에 시원한 청량감이 들었다. 우린 그렇게 자연이 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고 즐겼다.


"우리 장 보러 갈까? 며칠째 눈이 와서 먹을 것도 없는데..."

"엄마. 좋아요."

"그런데 눈이 너무 와서 운전을 할 수 도 없고. 어쩌지?"

"엄마 무슨 걱정이에요. 썰매에 끌고 가면 되잖아요."

맞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지금 아니면 언제 썰매로 장 본 걸 싣고 오겠나 싶었다.

"엄마가 할까?"

"아니요. 제가 할게요. 엄마도 타세요."


아이의 썰매 끄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난 어렸을 때 어떤 딸이었을까?

예민하고, 짜증 많고, 울음 많고... 기질이 까다로운 아이였다.

엄마는 '너 닮은 아이 낳아서 길러봐라. 그럼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알 거야' 종종 얘기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정말 싫었다. 그 말을 들으면 눈물부터 났고 더 짜증을 부렸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다행히도 내가 아닌 신랑 성격을 닮았다. 잘 웃고, 밝고, 짜증도 없고, 화도 없는 아이들이다. 언니는 '너희 애들은 선물 같은 아이들'이라며 항상 말한다. 맞다. 진짜 선물 같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날 반성하고 후회하게 한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왜 외면하고 싶어 했을까? 

엄마한테 왜 따뜻한 말 한마디 한 적 없을까? 

엄마 손 한번 잡아드리지 못했을까?

엄마랑 장 보러 한번 간 적 없을까?



엄마. 나 어떤 딸이었어. 참 못된 딸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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