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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만의 여행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결국 우리 둘이다

by 유니스

낯선 나라가 두려운 게 아니라 너무 익숙한 그가 두렵다.


신혼 이후에 둘만의 첫 여행을 떠나기 전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오랜만에 나가는 해외여행의 기대보다도 홀가분하게 둘만 떠난다는 설렘보다도 너무 편한 나머지 생각 없이 나온 말들로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들뜬 기분마저 망쳐질까 하는 두려움이 더 앞서는 여행이었다. 떠나기 전부터 수차례 서로에게 당부를 하고 다짐도 하며 우리는 드디어 둘만의 여행을 떠났다.


엄마는 나이가 드시면서부터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난 그와는 반대로 나이 드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진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 중간중간에 세탁을 해서 입으면 되니 옷도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가방은 최단 시간에 최소한으로 후다닥 챙겼고 늦은 비행기라 타면 곧 잘거니 최대한 편안한 옷으로 슬리퍼 끌고 그저 집 앞에 달달한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사러 가는 것 마냥 집을 떠났다.


공항에서 마지막 한식을 먹으려 하는데 우리 테이블의 키오스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서서히 내가 우려하던 남편의 조급증이 발동하기 시작하며 그의 얼굴은 벌겆게 달아오르며 불안 초조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지금 여행 떠나는 거야! 편안하게 즐기려고 여행하는 거라고. 어디 큰 수주 따내려고 가는 거 아니잖아! 급할 게 하나도 없어"

"키오스크가 작동이 안 되니 주문도 늦어지고 결제도 제대로 안되니까 그렇지. 주문이 늦어지면 음식도 늦게 나오잖아. 봐봐 저기 저 사람들 우리 뒤에 왔는데 음식이 먼저 나오잖아"

"키오스크 안 돼도 구두로 주문했고, 결제도 나가면서 직접 하면 된다고 하잖아.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

"첫발부터 이러니 짜증이 나지. 도대체 왜 이런 거야?"

"그 짜증을 지금 나한테 내고 있는 거 알아? 본인은 답답해서 하는 소리지만 상대편에 앉아있는 나에게 다 짜증으로 돌아오고 있어. 여행 시작부터 이렇게 할 거야? 혹시 여행 내내 이럴 건 아니지? 분명히 느긋하게 생각하겠다고 약속하고 왔잖아. 그럴 거면 그냥 집에 가자"

"......................."

입안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은 내려 깔고 목소리를 낮추어 최대한 참으며

"계속 이럴 거면 돈 쓰면서 여행 갈 이유가 없어. 조급해하지도 짜증도 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나가자. 나는 내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 옆에서 방해할 거면 그냥 접자"

"......................."



탑승 대기실 맞은편에 앉은 여자 어르신의 표정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선뜻 말을 걸지도 못하고 그저 그 분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낼 뿐이었는데 넉살의 대마왕 남편은 어르신에게 이것저것 잘도 물어본다. 우리랑 도착지가 같다는 것을 알고 여자 어르신의 표정이 풀리신다. 자녀들 없이 떠나는 첫 번째 여행이시라며 패키지여행인데 도착지에서 가이드를 만나기로 해서 걱정이 되었다고 하셨다. 우리랑 도착지가 같아서 안심이라며 좋아하셨지만 그분들은 대한항공을 우리는 저가항공을 타서 같은 시간이었지만 같은 비행기를 탈 수는 없었다.

"지금 제일 좋을 때야! 많이 다녀요. 곧 있음 손주 봐준다고 여행도 못 다녀"

설마.....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오래 여행도 못 가. 음식도 안 맞고. 저가항공은 힘들어서 타도 못해. 그러니 지금 부지런히 다녀요"

그분들도 둘만 계시니 상대에게 맞추려 참으시고 배려하는 하시는 모습이 살짝살짝 보였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다니시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고 부부의 소중함을 엿볼 수 있었다.


생활 패턴이 비슷하다는 건 함께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이다.

아이들이 다 자라니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기상 시간, 식사 시간, 취침 시간이 다 달라서 네 명이 다 만족하는 여행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서로 아침에 눈 뜨는 시간, 잠이 드는 시간 그리고 식사 시간이 같다는 건 불편함 없이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뜨고 함께 조식을 먹으러 가서 여유로운 식사 시간을 가지고 오전 산책을 하고 맛있는 커피집을 찾아가서 마실 수 있다는 건 우리가 함께한 20여 년의 시간이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되고 함께 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호텔에 들어와서는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쉬다가 맛집을 찾아서 점심을 먹고 천천히 구경을 하고 쇼핑도 즐길 수 있고 힘들면 다시 숙소에 들어와 쉬면 되었다. 낮잠을 자며 들리는 상대의 코 고는 소리가 거슬리지 않고 그저 ASMR 같다. 뭔가에 쫓기지 않는 목적이 없는 여행, 한 사람만 조금만 맞추어 주면 되는 여행이 참 편했다.

함께 하다 각자 보고 싶은 게 있음 헤어졌다 연락해서 다시 만나면 되니 투덜거리나 섭섭할 것도 없었다. 네 명이 다닐 땐 맞추기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를 하면 누군가는 꼭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모두에게 만족하는 여행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보기도 맘 편하지 않았다.

이렇게 여행을 즐길 수가 있다니.... 이렇게나 여유로울 수 있다니.....

나는 남편만 맞추면 되고 남편은 나만 맞추면 된다. 서로가 어떻게 맞추어주면 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근데 여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서로 고집을 부리고 우선순위에 자기 자신을 넣었을까.

상대방을 우선순위에 두고 내가 후순위에 들어가면 순탄하고 편했을 텐데 말이지.

점심은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저녁은 남편이 먹고 싶은 걸 먹으면 된다.

남편이 가고 싶은 곳을 먼저 가면 그다음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면 되는 것을 우리는 늘 각자 내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우겼던 것 같다.

그리고 네 명을 맞추다 두 명만 맞추면 되니 모든 것이 수월했다.


처음 아이들을 남겨 두고 우리 둘이서만 여행을 떠난다고 결정했을 때 '둘이 가서 재미가 있겠어?'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둘이서만 떠난 여행은 솔직히 그 어느 여행보다 훨씬 좋았다.

우선은 경비가 반이니 경제적 부담이 확 줄었고, 시간활용도가 더 효율적이었고, 신경 쓸 일도 반으로 줄어서 제대로 쉬다 온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부부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편한 여행 메이트는 부모나 자녀는 절대 될 수가 없었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매번 티격태격 싸워도 결국 함께 할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쓸데없이 기싸움 같은 어리석은 일로 힘과 시간 낭비를 말아야겠다.


언제 떠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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